[소강석 목사의 블루 시그널] 베아트리체가 될 수는 없을까

입력 2021-08-05 03:01

단테의 신곡을 아는가. 그 위대한 작품 이면에는 단테와 한 여인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단테는 35세 때 피렌체 국무장관 자리에 오른다. 그런데 그가 외교적 업무로 피렌체를 떠나 있었을 때 쿠데타가 일어나 실각하고 추방당하게 된다. 그때부터 그는 20여년 동안 타국에서 고통스러운 유랑생활을 시작했다. 그 외로운 망명 생활 중에 그를 가슴 저리게 하는 한 사람이 베아트리체였다.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아홉 살 때 만난다. 어린 나이에도 그녀를 본 순간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보였다. 그리고 9년 후 18세가 되어 다시 만났을 때 단테는 심장이 멈추는 듯한 영혼의 전율을 느꼈다. 그녀가 성녀처럼 보인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단테는 베아트리체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그녀는 돈 많은 은행가에게 시집을 가 버린다. 그리고 2년 만에 콜레라에 걸려 24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비극적 이별을 겪은 후, 단테에게 베아트리체는 동경의 동경, 사랑의 근원적인 목마름의 대상이 된다. 그러다가 그는 그 심연의 고통 중에 신곡을 쓴다. 신곡은 종교개혁 이전에 쓴 작품이기 때문에 참혹한 지옥뿐 아니라 연옥도 소개한다.

그런데 단테가 지옥과 연옥을 구경한 후 천국문 입구에 서자 그토록 가슴 절절히 동경하였던 베아트리체가 성녀가 되어 천국의 안내자로 등장한 것이다. 단테에게는 그 자체가 황홀한 천국의 모습으로 느껴졌다.

나는 단테를 천국으로 안내하는 베아트리체를 한국교회에 대입해 보고 싶다. 코로나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단테처럼 절망과 우울, 분노와 낙심에 빠져 방황하고 있는가. 이러한 때, 한국교회가 베아트리체가 되어 이 시대의 괴로워하는 단테들에게 좋은 기억, 좋은 경험을 시켜주어야 한다. 우리만의 이너워십, 카르텔을 쌓지 말고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베아트리체와 같은 천국의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

당연히 우리는 예배의 존엄성과 가치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코로나로 인해 고통 받는 이웃의 아픔을 위로하고 치유해야 한다. 칼뱅은 흑사병이 창궐할 때 ‘쿼런틴(quarantine)’, 즉 격리 시스템을 운용하여 예배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감염을 차단하는 전혀 새로운 모델을 보여 주었다.

당시 칼뱅의 모습은 가톨릭과 차별화되면서 마치 베아트리체의 모습으로 보인 것이다. 그래서 제네바 시민들의 동경과 찬사를 받으며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다.

지금 한국교회도 코로나로 지친 현대인들에게 베아트리체의 모습으로 보일 수는 없을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갇힌 시대 속에 행복 바이러스가 되어 사랑과 희망의 파파게노 효과를 일으킬 수는 없을까.

이제, 한국교회가 이 시대의 베아트리체가 되어 코로나로 인하여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 아니 코로나 이전부터 떠났던 사람들을 다시 교회로 안내하고 돌아오게 할 준비를 해야 할 때이다.

물론 교회를 향한 정부의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방역수칙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나도 방역 관계자에게 문화 공연에 비해 형평성을 갖지 못하는 방역 조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번 주중에는 분명히 좀 더 유연한 조치가 나오도록 협의하고 있다. 방역본부도 자꾸 교회의 예배를 제재하려고만 하지 말고 교회가 이 시대의 베아트리체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상생 방역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정부의 말대로 연말쯤 집단면역체계가 형성된다면 한국교회가 먼저 코로나 아웃을 선언하고 안전한 예배를 위한 방역 매뉴얼을 만들어서 자체 방역, 자율 방역 시스템을 구축한 후 전략적으로 예배 회복을 선언하고 그 길을 열어야 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무조건 밀고 나가면 백발백중 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먼저 하나 되어 원 리더십, 원 메시지를 내야 한다. 예배의 숭고함을 지키면서도 선교적 안목을 가지고 장기적 포석을 둘 수 있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에 베아트리체의 모습으로 다가가며 사랑과 희망의 안내자 역할을 해야 한다. 코로나의 미로 속에서 희망의 출구를 찾고 있는 이 시대의 단테들에게, 한국교회가 천국을 안내하는 베아트리체가 되어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는 없을까.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예장합동 총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