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재벌의 요플레 뚜껑

입력 2021-08-05 04:02

한국은행은 최근 국민대차대조표를 발표했다. 가구당 순자산은 2015년 3억8515만원에서 지난해 5억1220만원으로 32.9%나 증가했다. 이전 5년간 가계 순자산 증가율(16.5%)의 배에 달한다. 부동산 가격 급등 영향이다. 그렇다면 사회 전체 행복수준은 자산 증가에 비례해 높아졌을까. 아닐 것이다. 오히려 주위엔 집값 때문에 힘들다는 한탄만 가득하다.

돈과 행복지수가 항상 비례하지 않는다는 건 이제 상식이다. 그 이유를 잘 설명해주는 실험이 있다. ‘①본인 연소득 5000만원, 사회 전체 평균 소득 2500만원. ②본인 연소득 1억원, 사회 전체 평균 소득 2억원. 당신은 둘 중 어떤 세상에 살고 싶나.’ 미국 하버드대 의대생들에게 물어봤더니 연 1억원을 버는 세상에 살겠다는 답은 절반에 그쳤다. 독일 교수 요하네스 발라허의 저서에 소개된 실험 결과는 소득 불평등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보여준다.

실제로 비교는 지옥을 부른다. 열심히 공부해서 번듯한 직업을 갖고, 의식주 걱정이 없는 상황인데도 불행을 느끼는 사람들이 주변에 수두룩하다. 직장 동료의 재테크 성공담에 잠 못 이루고, 동창의 서울 강남 아파트 가격 때문에 부부싸움을 하는 사례도 부지기수다.

그런데 행복의 조건이 비교로부터의 해방만은 아닌 듯하다. 부의 측면에선 사실상 비교 대상이 없을 법한 억만장자들도 불행을 호소한다. 과거 알리바바 마윈 회장은 “중국 최고의 부자라는 건 오히려 불행한 일일 수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언뜻 부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가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들의 얘기는 다르다. 자신들을 동경하지만 존경하지 않고, 그저 돈으로만 바라보는 게 고통이고, 압박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최근 들어 국내 재벌들의 행보도 달라지고 있다. 많이 벌어 세금을 더 내고, 일자리를 만드는 것을 최고의 선으로 생각했던 창업 1·2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경영과 소통 방식을 보여준다.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기로 한 김범수 카카오 의장처럼 ‘함께, 더불어’를 지향하는 재벌이 늘고 있다. 블랙록 등 세계적 자산운용사들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투자의 최우선 조건으로 내세우는 경향도 영향을 줬을 것이다.

물론 ‘악어의 눈물’이라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실천이 꾸준히 이어진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10년 전부터 사회적 가치를 강조해온 최태원 SK 회장. 그가 “회사 가치를 사업이 아닌 개인의 행복에 둬야 한다”고 얘기하고 다닐 때만 해도 사실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일종의 ‘쇼’가 아니냐는 수근거림도 있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사회적기업에 투자하고, 사업 구조도 환경친화적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이어지자 사람들의 보는 눈이 달라졌다. 특히 최근 SK그룹 계열사들이 최고경영자(CEO) 평가와 선임·연임 등을 사외이사 중심의 이사회 내부에서 결정한다고 공표했을 때 모두 놀라워했다. 총수의 가장 강력한 권한인 CEO 인사권을 사실상 내려놓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사회 문제를 풀기 위한 기업의 노력이 경제적 가치로도 연결될 수 있다는 최 회장의 소신도 다시 주목받는 분위기다.

최근 SNS 소통에 열심인 최 회장은 “혹시 회장님도 요플레 뚜껑 핥아 드시나요?”라는 팔로어의 질문에 “네 그렇습니다”라고 답해 화제가 됐다. ‘재벌도 우리와 다를 게 없네’라는 생각이 잠시나마 사람들을 ‘비교의 지옥’에서 해방시켰던 것 같다. 여전히 회사를 사유물쯤으로 여기는 일부 재벌들의 비뚤어진 행태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타적 가치’를 강조하면서 미래세대를 위한 장기 비전을 얘기하는 기업가들이 늘고 있는 점도 분명하다.

한장희 산업부장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