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은 패션이다] ‘내가 키운다’로 돌아온 영애씨… 삶의 굴곡 왜 중계하냐 묻지말자

입력 2021-08-07 04:06
예능 법정이 있다면 풍경이 어떨까. 검사가 물을 것이다. “그런 걸 왜 보여주나.” “굳이 저런 것까지 공개할 필요가 있나.” “그것이 미칠 영향은 고려해보았나.” 변호인의 답변도 예측 가능하다. “보려는 사람이 있으니 보여주는 것이다.” “시청자를 즐겁게 해주려는 의도를 고려해 달라.” 방청석 일부는 술렁일 것이다. “아무리 예능이라도 저건 좀 너무 나간 거 아닌가.”

개그우먼 출신 배우 김현숙의 프로필 사진. 이엘라이즈 제공

도대체 예능이란 무엇인가. 예능인이 나온다고 다 예능인가. 아니다. 뉴스에 등장하는 예능인도 가끔 있다. 교양 프로그램에 예능인을 투입한 지는 이미 오래됐다. “그냥 재밌으면 예능 아닌가.” 그럼 상당수의 드라마, 스포츠도 예능으로 분류해야 할 거다. 웃기는 뉴스는 또 얼마나 많은가.

예능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지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은 아니다. 콘텐츠의 장르 구분부터 다시 생각해보자. 이를테면 종합예술 중 연극과 영화는 구분이 확실하다. ‘내 눈앞에 실물이 있느냐 없느냐. 배우가 무대 위에 있느냐 화면 속에 있느냐.’ 종합편성 중 교양과 드라마도 구분이 쉬운 편이다. ‘사실이냐 허구냐.’ 문제는 예능이다. ‘저 사람의 말과 행동이 진짜일까 가짜일까.’ 누군가는 말한다. ‘진짜면 어떻고 가짜면 어때. 재밌으면 그만이지.’ 그러나 사실인 줄 알았는데 허위로 밝혀지면 화가 난다는 사람도 많다.

“이건 어디까지나 예능입니다.” 리얼리티 예능이 공격받을 때 제작진이 펼치는 부적이다. 질문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럼 어디까지가 예능입니까.” 중재인이 나선다. “지금은 예능 장르가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예능적 요소가 일부 혹은 다수 포함된 프로가 포진한 시대 아닐까요.”

인간적으로 안 통할 땐 법적으로 따진다. 법은 어떨까. 방송법에 예능이란 용어는 별도로 없고 대신 오락이라는 말이 있다. 오락을 전체 방송 시간의 100분의 60 이하로 편성하게 돼 있다. 장르 구획은 3등분이다. 보도는 색깔이 분명한데 교양과 오락은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개념 정리하는 데서부터 애 좀 먹었을 것 같다. 문서를 간추리면 ‘교양은 국민의 교양 향상 및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방송 프로그램과 어린이 청소년의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방송 프로그램, 오락은 국민 정서의 함양과 여가생활의 다양화를 목적으로 하는 방송 프로그램’이라고 나와 있다. 왠지 석연치가 않다.

내가 아는 교육학 교수는 ‘슈퍼맨이 돌아왔다’(KBS2TV)를 상당히 교육적인 프로로 간주한다. ‘미운 우리 새끼’(SBS)에도 비슷한 면이 있다. 부제가 ‘다시 쓰는 육아일기’다. 하물며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채널A)는 어떤가. 예능인도 나오지만 육아 모습을 관찰하며 전문가가 조언하고 ‘금쪽 처방’까지 내려준다. 교과서는 아니더라도 참고서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제목만으로도 프로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는 게 요즘 추세다. 예를 들면 ‘돌싱글즈’(MBN)는 ‘한번 다녀온 이혼 남녀들’ 이야기다. 이제 ‘일요일 일요일밤에’(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MBC)같이 두루뭉술한 제목은 구닥다리로 밀려났다. 교양 프로그램 제목도 센스 있는 것들이 많아졌다. ‘갈 데까지 가보자’(채널A 2012~2016)는 ‘안 싸우면 다행이야’(MBC)의 원조 같은 느낌인데 사실은 ‘특별한 사람, 놀라운 장소, 신기한 동물, 기이한 현상 등에 얽힌 사연을 소개하는 교양 프로그램’이었다.

예능 제목도 갈 데까지 가는 모양새다. ‘나 혼자 산다’(MBC) 같은 솔로의 삶에서 시작해 ‘동상이몽 2 너는 내 운명’(SBS) ‘아내의 맛’(TV조선) 같은 커플 라이프를 지나고 ‘슈돌’같은 육아를 거치는가 싶더니 한편에선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KBS2TV)처럼 ‘화려했던 전성기를 지나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 중인 중년 스타들의 동거 생활을 담은 프로그램’도 등장했다. 시즌3까지 이어진 거로 보아 비슷한 성격의 프로가 줄을 이을 가능성도 있다. 점입가경이라 해야 하나. 이제는 ‘돌싱글즈’(MBN)와 ‘용감한 솔로 육아- 내가 키운다’(JTBC)가 경쟁 구도를 형성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기획안을 살펴보니 ‘다양한 이유로 혼자 아이를 키우게 된 이들이 모임을 결성해 각종 육아 팁과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의 일상을 관찰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16’ 메인 포스터. tvN 제공

‘내가 키운다’(JTBC)에 ‘막돼먹은 영애씨’(tvN)가 나온 걸 보고 하마터면 노래를 부를 뻔했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영애씨는 극 중 이름이고 배우 이름은 김현숙이다. 친분이 있어서 결혼식에도 갔었다. 한마디 추가하자면, 내가 결혼축의금을 낸 연예인들 상당수가 이혼했다. 실명 거론은 안 하겠다. 혹시 이건 징크스일까. 오죽하면 이런 제목의 칼럼을 썼겠는가. ‘이혼하려거든 부조금을 반납하라’ 그랬더니 누가 조용히 말했다. “그 글은 이혼을 막는 게 아니라 결혼을 막는 거야.”(사족인데 내가 주례를 선 연예인은 모두 결혼 상태를 유지 중이다. ‘돌싱글즈’(MBN) 사회자인 유세윤, 가수 김창열 이한철, 개그맨 김학도 박명수 박경림 정성호 등이 그들이다.) 어찌 보면 예능과 결혼은 약간 닮은 거 아닐까 싶다. ‘오죽하면’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게 비슷하지 않은가.

김현숙의 예능 시작은 ‘개그콘서트’(KBS2TV)의 뚱뚱교 교주 ‘출산드라’(2005~2006)였다. “이 세상에 날씬한 것들은 가라. 이제 곧 뚱뚱한 자들의 시대가 오리니. 먹어라. 네 시작은 삐쩍 곯았으나 끝은 비대하리라.” 사이비 교주의 설교인데 현실에서 김현숙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방송 기간에 교회 신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고 한다. 끝부분 합창곡이 ‘영광 영광 할렐루야’였다가 군가 ‘진짜사나이’로 바뀐 것도 그런 맥락이다.

남편과 이혼 후 아들 하민군과 JTBC ‘용감한 솔로 육아- 내가 키운다’에 출연한 김현숙. JTBC 제공

‘아내의 맛’(TV조선)에 출연할 때만 해도 김현숙은 행복한 주부의 표본이었다. 그랬는데 얼마 안 지나서 돌연 ‘내가 키운다’(JTBC)로 갈아탔다. 내막은 오직 당사자만이 안다. 아니 지금 그가 아는 것이 나중엔 ‘그때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판단을 했구나’ 후회할 수도 있다. 삶의 굴곡을 굳이 중계 방송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지 말자. 그냥 짐작만 한다. “나는 나일 뿐이고 나의 가는 길은 내가 결정하고 내가 결정한 것은 내가 책임진다.”

주례사 비평을 살짝 곁들이자면 예능에서 아픈 가족사까지 보여주는 건 시청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삶의 의지와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믿음, 거친 세파에도 불구하고 명랑하게 사는 모습을 통해 누군가에겐 희망의 증거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 결합한 결과물일 것이다. 위안 삼아 나는 그런 사람들을 ‘명랑 히어로’라 부르고 싶다.

상상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명랑 히어로’(MBC 2008~2009)에서 지금도 기억나는 코너가 ‘두 번 살다- 명랑한 회고전’이다. 게스트가 흰옷을 입고 천국의 방으로 들어가면 지인들과 MC들이 장례식장에서 고인에 대한 뒷 담화를 나눈 뒤 윤종신이 추도문을 읽는다.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내 모든 게 다 달라졌어요’(윤종신 노래 ‘환생’ 중) 게스트가 미리 써놓은 유언장을 읽은 후 비로소 그는 거듭난다.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볼 계기가 됐다’는 의견과 ‘죽음까지 예능 소재로 삼다니 미쳤다’는 비난이 팽팽했다. 참고로 작곡가 유희열은 이 프로로 예능에 입문했으니 애초부터 삶과 죽음과 부활을 두루 체험한 셈이다.

국내 최장수 시즌프로그램(2007~2019 총 시즌17)인 ‘막돼먹은 영애씨’(tvN)는 드라마와 다큐와 예능이 혼재한 프로그램이다. 명대사도 많았다. 영애를 사이에 두고 산호가 여름 시즌도 아닌데 콩국수를 시키자 승준은 이런 말을 한다. “끝난 걸 왜 자꾸 아쉬워하나. 지나간 콩국수는 깨끗이 잊고 앞으로 나올 칼국수에나 신경 써라.”

주철환 프로듀서 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