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째 목회자… “하나님 위해 그저 죽고 썩어지면 그뿐인 삶”

입력 2021-08-06 17:54
서울 중화동 영세교회 김충렬 원로목사가 예배당 옆 ‘영세의 뿌리’ 새김판을 설명하고 있다. 이 교회는 김 원로목사의 할머니 박세라 사모의 기도와 고난 극복이 바탕이 됐다.

‘…하나님은 사람 중에 가장 힘센 사람을/ 저 지하 층 층 아래에서/ 땅을 받쳐 들게 하였다/ 어머니였다/ 수억 천년 어머니의 아들과 딸이/ 그 땅을 밟고 살고 있다’(신달자 시인 ‘어머니의 땅’ 중)

서울 지하철 중화역에서 도보 2분 거리에 영세교회(예장통합)가 자리한다. 영성이 배어나는 ‘예배당다운 예배당’ 건축물이다. 한 성도가 예배당 주 출입문 쪽 난간을 윤이 나도록 문지르고 있었다. 풍성한 느티나무가 예배당 앞길을 지나는 이들의 그늘이 돼 주었다. 지난 목요일 아침 풍경이다.

“생전 할머니의 모습은 훅 바람이 불면 쓰러질 것 같은 가냘픈 체구셨습니다. 세상 파고에 시달리셨을 텐데도 늘 옅은 미소가 떠나지 않으셨어요. 저는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남아선호 사상이라기보다 목회자의 대를 이어갈 귀한 손자로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날 영세교회 김충렬(74) 원로목사를 예배당 옆 뜰 ‘벧엘의 초막집’ 터에서 만났다. 2016년 은퇴한 그는 후임 목회자가 불편할까 봐 예배당에서 사진 찍는 걸 사양했으나 간곡한 청을 내치진 못했다. 영세교회는 1969년 설립됐다. 김 목사의 아버지 김종수(1918~1998) 목사가 어머니의 무덤에 예배당을 세웠다. 그 어머니, 김충렬 목사의 할머니인 박세라 사모의 친정 동네이기도 했다.

“제 할아버님이 한국교회 초대 목회자 김영구(1887~1928) 목사님이십니다. 1921년 서울 승동교회에 부임하셨어요. 그런데 주일 저녁 설교를 마친 후 서재에서 젊은 나이에 뇌출혈로 소천하셨어요. 교계에 충격이었죠.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이 추도문에서 ‘참생명을 가지고 있다가 그 생명의 길로 갔다’고 슬퍼하셨으니까요.”

김영구 목사는 대한제국 시절 한양법률학교를 나와 탁지부 관리로 일했다. 그러나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만주로 건너가 이동녕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하지만 지병이 악화해 귀국해야 했다. 이동녕은 민족교육에 힘써 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경성에서 일본인 기독교교육 운동가 마스토미와 우연히 교유하게 됐다. 그리고 그의 도움으로 일본 고베신학교에 진학했다. 양태승(기독교교육가) 윤치병(서울 안동교회 목사) 등과 함께였다. 이들은 유학을 마친 후 마스토미가 설립한 전북 고창 오산학당(고창고보 전신) 교사가 됐다.

“당시 할아버님의 설교는 서울 장안 청년들의 심장을 뛰게 했어요. 역사와 신앙에 대한 깊은 인식이 말씀 선포 가운데 이뤄졌으니까요. 당시 연희·이화·보성전문학교 학생들이 예배에 참석할 정도였어요. 자유주의 신학자 김재준 목사가 승동교회서 성령체험 후 형식적인 세례를 받지 않겠다고 하자 ‘이 사람아 예수 믿는 사람들의 공인증이네 받으시게’ 하시며 세례받게 하셨죠.”

김재준은 훗날 김영구의 마지막 설교를 기억했다. 요한복음 14장 강해 설교였다. “예수만 믿으면 그것이 여러분의 유산이고 내 유산이다. 나는 내 자녀에게도 이 그리스도의 신앙밖에 남길 것이 없다.”

“할머니는 ‘신앙밖에 없는 미망인’이 되셨어요. 유복자 포함해 다섯 자녀를 데리고 이곳 중화동 친정으로 왔습니다. 교계와 선교사들 도움으로 세브란스병원 청소부로 일하며 아이들을 키웠죠. 마스토미 장로가 할아버지 별세를 너무 안타까워하시고 10엔씩을 매달 보내 주셨는데 그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저축하셨어요. 예배당 부지를 사기 위해서였죠. 그리고 아들이 남편의 신앙을 따르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죠.”

한데 청년 김종수는 세상의 유혹과 벗했다. 연희전문 학생이었던 그는 “기독교는 패배한 종교”라며 어머니의 속을 새카맣게 타들어 가게 했다. 누가복음의 탕자였다. 어머니에게 술상 차리라고 호통치기도 했다.

“여기 보이시죠. ‘얘야 괜찮다. 다 모르고 그랬는걸. 얘야 괜찮다. 너 나와 같이 살자. 얘야 괜찮다. 다 나 때문이다. 얘야 괜찮다. 내가 죽고 썩어야지.’ 할머니께서 제 아버님에게 남긴 말입니다. 이 말씀을 훗날 아버지께서 ‘영세의 뿌리’라는 돌판으로 새기신 거죠. 아버님은 하나님 사랑을, 부모님 사랑을 뒤늦게 깨달으셨어요. 특히 그 고생 마다치 않고 괜찮다, 괜찮다 하시며 사랑으로 품으신 어머니 사랑을요. 뒤늦게 초막 지어 무덤을 지켰어요. 그리고 어느 날 환상을 보시고 어머니의 땅에 영세교회를 설립한 겁니다. 영 자, 세 자가 부모님 가운데 자인거죠.”

그 할머니의 땅에서 자란 김충렬 목사가 아버지에 이어 1988년 영세교회 담임 목회자가 됐다. “3대 신앙이 제 가문의 영광이 되어선 안 된다고 봅니다. 주님 영광된 일에 들어 써주신 거죠. 할머니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죽고 썩어지면 그만입니다. 그렇지만 이 땅의 백성에게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니 ‘어머니의 땅’ 교회가 영원해야죠.”

한편 영세교회 3대 김태수 목사는 김충렬 목사와 얼굴 한 번 본 적 없이 청빙됐다. “지금도 교인이 원로목사님을 뵙길 원하면 제게 먼저 연락하라고 권면하신다”며 “김영구 목사님과 박세라 사모님의 성품을 원로목사님을 통해 느낀다”고 말했다.

김충렬 목사는

고려대와 장신대에서 수학했다. 서울 노량진·남부교회 전도사, 대구제일·서울 영암교회 부목사, 서울 봉화현교회 개척. 영세교회 원로 목사. 서울 대광학원 이사, 서울동노회장 역임. 저서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김영구 목사 연설 들으러 가자’ 등 다수.

글·사진=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