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갈매기’ 성폭력 아닌 인간의 존엄에 대한 이야기”

입력 2021-07-29 04:04

영화 ‘갈매기’는 성폭행을 당한 60대 여성이 자신의 피해를 고발하고 가해자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여정을 보여준다. 영화를 만든 김미조(사진) 감독을 지난 27일 서울 서초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김 감독은 먼저 “한국 여성 감독들은 성폭력 주제가 아니면 영화를 못 만든다는 글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면서 “본질은 성폭력이 아니라 한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갈매기’는 평생 수산시장에서 일해온 오복(정애화)이 술자리에서 성폭행을 당한 후 노인이자 아내, 엄마, 동료로서 침묵을 강요당하지만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존엄성을 찾아가는 투쟁을 그린다. 김 감독은 영국의 복지 제도가 서민에게 가하는 수치심을 고발한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오복의 투쟁에서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이다”라는 피켓을 들고 거리에서 나선 블레이크의 모습이 겹친다.

김 감독은 “영화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가해자를 응징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라며 “오복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 저항하는 모습을 담았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구체적인 성폭력 장면을 배제한 것에 대해 김 감독은 “성폭력을 당한 여성의 이야기를 하면서 또 한 번 상처를 주고 싶진 않았다. 궁극적으로는 제가 현장에서 그런 장면을 찍으면서 좋은 컷을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오복의 피해와 저항 앞에서 가족은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남편 무일(장유)은 낙천적인 성격으로 늘 오복의 곁을 지키지만 ‘성폭행은 여자가 동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믿는다. 큰딸 인애(고서희) 역시 엄마가 경찰에 신고하도록 돕지만 결혼을 앞둔 상태라 엄마 얘기가 알려질까 스트레스가 심하다. 신고받은 경찰은 성폭력 피해자를 앞에 두고 증인이나 증거를 요구하기도 한다.

김 감독은 “가족의 지원이 두드러지진 않지만 가족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오복에게 힘을 준다”며 “무일과 이혼하거나 인애의 결혼이 파탄났다면 오복은 견디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오복의 동료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보다 현실적이다. 오복의 일터인 수산시장 상인들은 재개발 이권에 눈이 멀어 오복의 피해를 외면한다. 오복은 그 속에서 입을 열 용기를 내지 못 한다.

실제로 성폭력 사건을 고발하는 건 쉽지 않다. 특히 중년 여성들에겐 더욱 어려운 일이다. 김 감독은 “자료 조사를 위해 60대 여성분들을 인터뷰했는데, 오복에게 생긴 일이 자신에게도 벌어진다면 말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다들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오복이 일어서서 저항하게 되는 계기는 의외의 사건에서 찾아온다. 불탄 건물 위에서 고공 시위하는 이름 모를 사람을 마주치면서다. 그를 보고 슈퍼 주인은 “요즘은 죄다 권리 타령이야. 더운데 자기만 손해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오복은 거기서 “저 이름 모를 사람도 홀로 싸우네. 아무도 안 알아주지만 나라도 내 목소리를 내야지”라고 결심한다.

김 감독은 “다른 선택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영화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보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