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근 목사의 묵상 일침] 누가 큽니까

입력 2021-07-28 03:05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쭈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가까이하시자, 곧 임할 천국에서 차지할 지위에 관심이 커졌다. 오늘날에 빗대어 말하면, “예수님이 정권을 잡으시면 우리 중 누가 총리가 됩니까. 장관은 누가 합니까. 선발 기준이 뭡니까” 같은 질문이었다.

이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3~4)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 주로 어린아이의 순수성, 순종, 겸손 등을 배우라는 의미로 이해하고는 한다. 이는 어린아이를 긍정적 이미지로 바라볼 때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 어린이는 불완전하고 미숙하고 연약한,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만약 누군가를 ‘어린아이 같다’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욕이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것은 비천한 존재, 무시 받을 만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 하나 내세워 자랑할 것이 없는 자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즉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요, 의가 없고 무력하고, 내세울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천국은 자신의 공로가 아닌 예수님의 은혜로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자들의 질문은 애초에 번지수가 잘못됐다. 그들은 땅의 시각에서 하늘의 질서를 이해하고 있었다. ‘누가 큽니까’라는 질문은 자신도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질문이다. 천국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이라 생각한 제자들은 자신들이 그곳에서 어느 정도의 명예를 얻을 수 있을지 궁금해했다. 그러나 그것은 천국에 속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생각은 아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신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당시의 관점에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일은 혁명적 사고 전환이 필요한 일이었다. 누군가를 영접하고 환영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신을 같은 수준에 놓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명예를 드높이고 싶어 하는 문화에서, 자신보다 낮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자들과 함께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일은 스스로 어린아이처럼 될 때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사회에서 무시당하는 사람들을 실제로 환영하는 것을 통해 제자 공동체가 이 땅의 질서가 아닌, 하늘의 질서로 다스림 받고 있음을 나타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스스로를 어린아이처럼 무가치한 존재로 여긴다는 것은 단지 마음의 문제가 아니다. 겸양지덕을 쌓으라는 의미도 아니다. 이것은 반드시 새로운 삶의 실천과 태도로 나타나야 하는 일이다.

제자들이 누가 크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의 초점은 ‘작은 자’를 향하고 있다. 결국 ‘우리 곁에 있는 작은 자들을 어떠한 태도로 대하는가’가 교회의 건강성과 성숙도를 구분 짓는 중요한 척도다. 한국교회에 많은 과제가 있겠지만 가장 먼저 우리 자신을 어떤 존재로 여기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낮은 자리에 위치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크고 높은 지위를 열망하면서 하늘의 질서를 땅의 것으로 대체하고 있는가. 십자가 아래서 높아진 마음을 낮추고, 작은 자들을 환영하며 천국의 새로운 질서를 나타내는 교회가 되길 소망한다.

(삼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