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잡러’ 된 항공사 승무원 “회사 몰래 알바해요”

입력 2021-07-27 04:01

“혹시, 분양사무소 아르바이트 해볼래?”

한서연(가명)씨가 지난 4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당장 할게.” 서연씨의 제안에 동료들은 다들 하겠다고 나섰다. 서연씨와 동료들은 국내 대형 항공사 소속 30대 승무원들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여행 수요 급감으로 항공사들이 극심한 타격을 입으면서 승무원 순환 근무가 일반화됐다. 서연씨는 지난 1년간 단 두 달만 일을 할 수 있었다.

근무 시간이 줄어든 만큼 손에 쥐는 월급도 줄었다. 기본급이 낮고 수당과 상여금 비중이 높은 승무원 급여 구조상 서연씨가 받는 돈은 평상시의 60%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동료 중 한 명은 지난해 3월 대출을 받아 부모님께 집을 사드렸다. 빠듯하지만 지출을 줄이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두 달 뒤 코로나19로 항공사들이 휴업을 시작했다. 생활비조차 감당하기 버거운 상태가 계속되자 추가로 벌이를 할 수 있는 직업으로 눈을 돌렸다. ‘N잡러’가 되기로 한 것이다.

N잡러란 2개 이상의 수를 뜻하는 ‘N’과 직업을 뜻하는 ‘잡(job)’이 합쳐진 신조어로 여러 직업을 가진 이를 뜻한다. 경제적 자유를 위해 수입을 늘리는 젊은 세대의 직업관을 보여주는 단어였지만, 코로나시대 N잡러는 ‘생계형’이다. 코로나19로 직격탄을 입은 사업장의 근로자들은 직장의 ‘겸직 금지’ 조항에 묶여 일감이 줄어든 상황임에도 구직 활동이 어려웠다. 회사 몰래 일을 구하다 보니 일자리의 질은 떨어지는 게 보통이었다.

그나마 지난 3월 고용노동부가 소득이 줄어든 승무원 유급 휴직자가 일용근로(1개월 미만)나 단시간 근로(주 15시간 미만)로 추가 소득이 발생해도 고용유지지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면서 상황이 나아졌다. 정부가 일용근로나 단시간 근로에 대해 ‘겸직 금지’ 예외의 길을 열어준 셈이기 때문이다.

서연씨와 동료들은 ‘4대 보험’(국민연금·건강보험·고용보험·산재보험)에 가입되지 않는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분양사무소 안내데스크 아르바이트를 먼저 시작한 서연씨는 자리가 나자마자 동료 2명을 소개했다. 서연씨는 26일 “사실상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으로 지내는 동료들도 있었는데 대출 이자부터 생활비, 아기 육아비까지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확산이 장기화하면서 서연씨처럼 본업 수입이 크게 줄어 N잡러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부지기수다. 이들은 언제 회복될지 모르는 본업 근무에 작은 기대를 걸면서 동시에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구하고 있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