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주시 오송고 2학년 김소희양에게 지난 1학기 충북도립대에서 수강한 생명과학실험 수업은 ‘값진 실패’를 가르쳐준 시간이었다. 대학에서 진행한 과학실험은 고교와 달랐다. 고교에서 진행하는 실험은 잘 짜인 각본에 따라 진행하기 때문에 실패 요소가 별로 없었다. 대학 실험실에선 온도와 습도 같은 다양한 변수를 학생들이 직접 통제해가며 실험을 진행해야 했다.
김양은 친구 한 명과 조를 이뤄 중력을 이용해 단백질을 정제하는 실험을 진행했지만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지는 못했다. 김양은 “대학 실험실에서 새로운 도구를 사용하다보니 용액의 양을 틀리거나 원심 분리하는 시간이 늘었다든지 하는 실수가 있었어요”라며 “실험은 원래 실패가 더 많죠. 당시 실패로 인해 실험과 더 친숙해진 느낌이에요. 뭘 놓쳤는지 공부하며 더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김양은 예비 생명공학도다. 뇌과학쪽에 특히 관심이 많다. 평소 사람의 생각에 관심이 많았는데 결국 뇌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됐다. 하지만 적성에 맞는지, 대학에서 전공으로 해도 좋을지 늘 궁금했다. 학교 수업이나 유튜브 영상 등도 재미는 있지만 이런 갈증을 해소해주지 못했다. 김양은 고3이 되기 전에 생명과학실험 수업을 만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그는 “대학 수업을 간접 경험하며 진로에 확신을 가진 게 가장 큰 성과죠. 힘들고 어려웠지만 즐거웠어요. 안심하고 몰입할 수 있는 계기였어요”라고 말했다.
김양에게 강렬한 지적 자극을 준 생명과학실험 수업은 원래 오송고의 정규교육과정에는 없었다. 보통의 고교에는 개설하기 힘들고 과학고에서나 접할 수 있는 수업이었다. 오송고에서는 생명과학 쪽으로 진로를 희망하는 학생들이 수업 개설을 요구했고 교사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일단 오송고가 고교학점제 요소를 부분 도입한 고교학점제 선도학교여서 수업 개설을 시도해볼 수 있었다. 이 학교는 1학기 시작 한 달 전인 2월에 학생들에게 어떤 수업을 듣고 싶은지 수요조사를 벌인다. 학생 15명 이상이 모이면 정규교육과정으로 편성할 수 있다. 문제는 소수 학생들이 원하는 수업이다.
생명과학실험 수업도 최초 3명이 신청했다. 이 학교에서 고교학점제 실무를 맡은 한상아 교육과정지원부장과 생명과학실험 수업을 요구한 학생들이 머리를 맞댔다. 한 교사는 “아이들이 진로 설계에 꼭 필요한 과목이라고 입을 모았는데 교사로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일단 학교 내에서 학생들을 더 모아보기로 했다. 그러자 학생들이 친구 3명을 더 데려왔다. 이 중에 김양도 있었다.
이제 한 교사의 몫으로 넘어왔다. 충북교육청은 이런 교사·학생들이 활용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충북을 13개 권역으로 나누고 권역 내 학교들이 공동교육과정을 운영하는 토대를 만들어놨다. 고교생 50%가 몰린 청주시만 5개 권역으로 나누고 나머지는 교육지원청 단위로 구분했다. 권역별로는 교감과 교육과정부장 등이 참여하는 자율협의체를 구성했다. 오송고가 속한 청주 5권역에는 5개 고교가 있다. 한 교사는 일단 자율협의체에서 이들 5개 고교를 두드렸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미 생명과학실험 수업을 진행했거나 수업 시간을 맞추기 어려웠다. 권역 밖으로 눈을 돌렸지만 수업시간이나 거리 등 뭔가 하나씩 어그러졌다.
그래서 ‘플랜 B’를 가동했다. 대학이었다. 교육부는 ‘지자체-대학 협력 기반 지역혁신사업’(RIS)을 진행하고 있다. 지역 대학들이 일종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지역 산업에 특화된 인재를 키우고 정부는 예산을 대는 사업이다. 충북은 제약바이오, 정밀의료·의료기기 등을 핵심 분야로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교육부는 이 사업에 참여하는 대학들이 고교학점제를 지원하도록 하고 있다. 충북교육청도 도내 대학들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대학의 교육 인프라를 고교들이 활용하는 길을 터놨다.
한 교사는 충북도립대 바이오생명의약과 김희대 교수와 접촉했다. 김 교수를 알게 된 건 충북교육청과 청주교육지원청으로부터 받은 공문 덕분이었다. 공문에는 대학에서 개설 가능한 수업과 교수 명단이 있었다. 고교생 대상 강의를 자원한 교수들이었다. 학생 눈높이에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는 기우였다. 김 교수의 지도·평가계획을 과학교사들과 검토해보니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렇게 오송고 학생 6명은 원하던 수업을 듣게 됐다. 주어진 시간은 34시간이었다. 실험 수업의 특성상 중간에 흐름이 끊기는 것보다 연속해서 수업을 진행하는 게 좋다. 정규수업 시간을 빼기는 어려워 2주에 걸쳐 토·일요일에 진행했다. 하루 8시간씩 강행군이었다. 학생과 인솔교사가 오전에 오송고로 모이면 충북도립대는 차량을 제공해 아이들을 대학으로 데려왔다.
한 교사는 “과목 하나 새로 개설하려면 일이 정말 많아진다. 과목이 늘수록 업무는 폭증하게 되는데 아이들은 자기가 원한 수업을 들을 때 태도 자체가 다르다. 정말 열심히 하는데 이런 모습을 한 번 보면 (수업 개설을) 멈출 수가 없게 된다”며 웃었다.
한국교육개발원·국민일보 공동기획
청주=이도경 교육전문기자 yid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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