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실험실의 ‘각본’ 없는 실험… 실패하며 더 많이 배웠죠”

입력 2021-07-27 04:05 수정 2021-07-29 15:57
충북도립대 바이오생명의약과 김희대 교수가 지난 4월 고교생을 위해 대학에 개설한 생명과학실험 수업에서 충북 오송고 학생들이 실험에 집중하고 있다. 오송고 제공

충북 청주시 오송고 2학년 김소희양에게 지난 1학기 충북도립대에서 수강한 생명과학실험 수업은 ‘값진 실패’를 가르쳐준 시간이었다. 대학에서 진행한 과학실험은 고교와 달랐다. 고교에서 진행하는 실험은 잘 짜인 각본에 따라 진행하기 때문에 실패 요소가 별로 없었다. 대학 실험실에선 온도와 습도 같은 다양한 변수를 학생들이 직접 통제해가며 실험을 진행해야 했다.

김양은 친구 한 명과 조를 이뤄 중력을 이용해 단백질을 정제하는 실험을 진행했지만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지는 못했다. 김양은 “대학 실험실에서 새로운 도구를 사용하다보니 용액의 양을 틀리거나 원심 분리하는 시간이 늘었다든지 하는 실수가 있었어요”라며 “실험은 원래 실패가 더 많죠. 당시 실패로 인해 실험과 더 친숙해진 느낌이에요. 뭘 놓쳤는지 공부하며 더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김양은 예비 생명공학도다. 뇌과학쪽에 특히 관심이 많다. 평소 사람의 생각에 관심이 많았는데 결국 뇌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됐다. 하지만 적성에 맞는지, 대학에서 전공으로 해도 좋을지 늘 궁금했다. 학교 수업이나 유튜브 영상 등도 재미는 있지만 이런 갈증을 해소해주지 못했다. 김양은 고3이 되기 전에 생명과학실험 수업을 만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그는 “대학 수업을 간접 경험하며 진로에 확신을 가진 게 가장 큰 성과죠. 힘들고 어려웠지만 즐거웠어요. 안심하고 몰입할 수 있는 계기였어요”라고 말했다.

김양에게 강렬한 지적 자극을 준 생명과학실험 수업은 원래 오송고의 정규교육과정에는 없었다. 보통의 고교에는 개설하기 힘들고 과학고에서나 접할 수 있는 수업이었다. 오송고에서는 생명과학 쪽으로 진로를 희망하는 학생들이 수업 개설을 요구했고 교사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일단 오송고가 고교학점제 요소를 부분 도입한 고교학점제 선도학교여서 수업 개설을 시도해볼 수 있었다. 이 학교는 1학기 시작 한 달 전인 2월에 학생들에게 어떤 수업을 듣고 싶은지 수요조사를 벌인다. 학생 15명 이상이 모이면 정규교육과정으로 편성할 수 있다. 문제는 소수 학생들이 원하는 수업이다.

생명과학실험 수업도 최초 3명이 신청했다. 이 학교에서 고교학점제 실무를 맡은 한상아 교육과정지원부장과 생명과학실험 수업을 요구한 학생들이 머리를 맞댔다. 한 교사는 “아이들이 진로 설계에 꼭 필요한 과목이라고 입을 모았는데 교사로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일단 학교 내에서 학생들을 더 모아보기로 했다. 그러자 학생들이 친구 3명을 더 데려왔다. 이 중에 김양도 있었다.

이제 한 교사의 몫으로 넘어왔다. 충북교육청은 이런 교사·학생들이 활용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충북을 13개 권역으로 나누고 권역 내 학교들이 공동교육과정을 운영하는 토대를 만들어놨다. 고교생 50%가 몰린 청주시만 5개 권역으로 나누고 나머지는 교육지원청 단위로 구분했다. 권역별로는 교감과 교육과정부장 등이 참여하는 자율협의체를 구성했다. 오송고가 속한 청주 5권역에는 5개 고교가 있다. 한 교사는 일단 자율협의체에서 이들 5개 고교를 두드렸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미 생명과학실험 수업을 진행했거나 수업 시간을 맞추기 어려웠다. 권역 밖으로 눈을 돌렸지만 수업시간이나 거리 등 뭔가 하나씩 어그러졌다.


그래서 ‘플랜 B’를 가동했다. 대학이었다. 교육부는 ‘지자체-대학 협력 기반 지역혁신사업’(RIS)을 진행하고 있다. 지역 대학들이 일종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지역 산업에 특화된 인재를 키우고 정부는 예산을 대는 사업이다. 충북은 제약바이오, 정밀의료·의료기기 등을 핵심 분야로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교육부는 이 사업에 참여하는 대학들이 고교학점제를 지원하도록 하고 있다. 충북교육청도 도내 대학들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대학의 교육 인프라를 고교들이 활용하는 길을 터놨다.

한 교사는 충북도립대 바이오생명의약과 김희대 교수와 접촉했다. 김 교수를 알게 된 건 충북교육청과 청주교육지원청으로부터 받은 공문 덕분이었다. 공문에는 대학에서 개설 가능한 수업과 교수 명단이 있었다. 고교생 대상 강의를 자원한 교수들이었다. 학생 눈높이에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는 기우였다. 김 교수의 지도·평가계획을 과학교사들과 검토해보니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렇게 오송고 학생 6명은 원하던 수업을 듣게 됐다. 주어진 시간은 34시간이었다. 실험 수업의 특성상 중간에 흐름이 끊기는 것보다 연속해서 수업을 진행하는 게 좋다. 정규수업 시간을 빼기는 어려워 2주에 걸쳐 토·일요일에 진행했다. 하루 8시간씩 강행군이었다. 학생과 인솔교사가 오전에 오송고로 모이면 충북도립대는 차량을 제공해 아이들을 대학으로 데려왔다.

한 교사는 “과목 하나 새로 개설하려면 일이 정말 많아진다. 과목이 늘수록 업무는 폭증하게 되는데 아이들은 자기가 원한 수업을 들을 때 태도 자체가 다르다. 정말 열심히 하는데 이런 모습을 한 번 보면 (수업 개설을) 멈출 수가 없게 된다”며 웃었다.

한국교육개발원·국민일보 공동기획

청주=이도경 교육전문기자 yid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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