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와 아이들’이 맞아요, ‘서태지와 아이돌’이 맞아요?”
어린 친구의 질문을 받는 순간 머리가 띵해지면서 한때 원로가수 고복수의 노래 ‘짝사랑’에 나오는 ‘으악새’를 억새풀이 아닌 절규하는 새(鳥)로 알았던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동시에 스무 살 서태지가 부르던 ‘환상 속의 그대’ 가사가 화살처럼 가슴에 날아와 꽂혔다.
어린 친구의 질문을 받는 순간 머리가 띵해지면서 한때 원로가수 고복수의 노래 ‘짝사랑’에 나오는 ‘으악새’를 억새풀이 아닌 절규하는 새(鳥)로 알았던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동시에 스무 살 서태지가 부르던 ‘환상 속의 그대’ 가사가 화살처럼 가슴에 날아와 꽂혔다.
“세상은 Yo! 빨리 돌아가고 있다. 시간은 그대를 위해 멈추어 기다리지 않는다.” 하기야 서태지가 데뷔하던 무렵에 그들 자체가 최고의 아이돌이었지만 예능에서 아이돌이란 말은 거의 쓰지 않았다.
이제 화면은 1992년 ‘일요일 일요일 밤에’(MBC) 스튜디오로 전환된다. 얼마 전 ‘특종TV연예’에 출연했던 화제의 신인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이 오늘의 게스트다. 대본상 서태지 혼자만 토크 자리에 앉도록 했는데 매니저가 난색을 표했다. “감독님, 웬만하면 세 명 다 앉혀주시죠.” 그러나 무리 없이(원안대로) 녹화는 진행됐다. 당연히 뒷말도 앙금도 없었다.
컬러링과 벨소리에 익숙한 10대에게 이장희의 ‘그건 너’(1973)는 참 아득한 얘기처럼 들릴 것이다. “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 종일토록 번호판과 씨름했었네. 그러다가 당신이 받으면 끊었네. 웬일인지 바보처럼 울고 말았네.” 지금 아이돌그룹을 출연시키면서 그중 PD가 딱 한 명만 골라 자리에 앉힐 수 있을까. 시대는 달라졌다. 이건 시대유감이 아니라 격세지감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처음 방송사 사무실에 등장할 때만 해도 매니저의 손엔 모바일 대신 CD가 들려있었다. 검색하고 공유하고 다운 받는다는 말은 누구도 쓰지 않았다. 시장이 음반에서 음원으로, 일상이 공중전화에서 이동통신으로 전환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고 그에 따라 방송사 PD의 위상도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음반이 사라졌다고 음악도 사라진 건 아니다. 오히려 음악은 날개를 달고 전 세계를 향해 훨훨 떠다니게(스트리밍) 됐다.
1996년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하고 H.O.T.가 데뷔한 해다. 한국 아이돌의 역사를 살필 때 맨 앞에 배치하고 싶은 장면이 있다. “저희는 오늘 1996년 1월 31일을 기하여 지난 4년간의 가요계 생활을 마감하고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년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그 유명한 은퇴 기자회견문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들이 밝힌 해체이유도 지금 읽으면 사뭇 낭만적이다. “무엇보다 앞선 은퇴 이유는 팬들의 가슴 속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고 싶다는 저희 다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쪽에서 이수만의 계획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혹시 SHJY라고 들어보았는가. 먹고살기 바쁜 어른들은 잘 몰라도 K팝에 관심 있는 초등학생들은 오히려 안다. 대표의 이름이 각각 이수만, 방시혁, 박진영, 양현석인 연예기획사, 혹은 엔터테인먼트회사들을 가리킨다. SM, HYBE, JYP, YG의 머리글자가 SHJY다. 여기 직원들은 이제 미래의 스타를 찾아서 길거리나 학교 앞을 서성거리지 않는다. 들어오려고 줄을 서 있는 연습생, 아니 연습지망생 중에서 골라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이야기 한 토막. 지인을 통해 심동식 선생을 만난 게 거의 20년 전이다. 국어교사인 그분은 중고생 아들이 길거리 캐스팅을 당했는데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지금 자랑하시는 거 맞죠.” 상대방은 진지한데 초면에 이렇게 말하면 무례한 거다. 더구나 내가 국어교사 출신 PD인 걸 알고 일부러 찾아오신 분 아닌가.
눈에 띌 정도로 외양은 캐스팅 디렉터의 합격선에 들었다고 하니 이럴 땐 무엇보다 아들의 열망이 궁금하다. “본인이 얼마나 원하나요.” “몹시 해보고 싶은 눈친데 도무지 미래를 알 수 없어서…” 누가 미래를 알 수 있을까. 아빠가 보기엔 학업성적도 좋고 학교생활도 잘하는 금쪽같은 녀석일 것이다. 공부와 연예를 병행할 수만 있다면 참 좋으련만. 당사자의 얼굴도 못 본 채 이루어진 그날의 상담은 예상한 대로 하나 마나 한 결론으로 끝을 맺었다. 공부가 제일 안전할 것 같긴 한데 혹시 모르니 본인과 더 깊이 대화를 나눠보고 기획사 쪽과도 면담을 해보는 게 좋겠다는 흐리멍덩한 조언이 전부였다. 미안하지만 나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아이들은 자란다. 그 후 아들은 어떻게 됐을까. 연습생으로 들어간 아들은 몇 년이 지나 SM 소속의 아이돌그룹으로 데뷔했다. 본명이 창민인데 앞에 최강을 붙여서 소년은 최강창민으로 거듭났다. 5명으로 데뷔할 때나 2명으로 줄어든 후에도 팀명은 그대로 동방신기였다. 심 선생을 나랑 연결해준 당시 개포고등학교 박미선 선생과 오랜만에 통화하면서 후일담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 창민이를 강제로 막았다면 지금 그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과연 밟고 지나온 길이 더 행복했을까, 아니면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제목처럼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 더 행복했을까. 다른 아이가 최강OO이 되었다면 그는 정말로 최강이 됐을까 등등.
최강은 단지 꿈일 뿐이고 최선이 인간의 길이다. 최선을 다한다고 최고가 된다는 보장도 없고 지금 최고라고 최후에 행복할지도 불분명하다. 이쯤에서 자칭 뮤직 스토리텔러인 나에게는 SM의 창시자이면서 총괄 프로듀서인 이수만의 가수 시절 히트곡 3개가 잇달아 떠오른다. 그 제목은 각각 ‘한 송이 꿈’ ‘행복’ 그리고 ‘모든 것 끝난 뒤’다. ‘한 송이 꿈’은 특별한 노래다. 작곡은 정태춘이 했고 지명길이 작사했다. 그런데 똑같은 멜로디에 제목이 다른 노래가 또 있다. 정태춘의 ‘장마’가 그 곡이다. 정태춘의 한 송이 꿈이 음반 사전검열 폐지였고 서태지의 ‘시대유감’이 그 폐지의 한 촉매 역할을 한 걸 보면 세상이 참 좁게 엮여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옛날얘기를 뭐하러 자꾸 끄집어내냐 추궁한다면 수학의 정석을 빌려 얘기하겠다. 누구라도 미적분에 도전하려면 구구단부터 시작한다. 예능의 세계에서 이수만은 안 해본 게 거의 없다. 작사 작곡 가수 MC에서 매니저 프로듀서 최고경영자까지. 시청자로서 내가 기억하는 이수만은 제1회 대학가요제(1977) MC다. 그리고 현진영의 음반제작자로서 무던히도 방송사를 드나들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수만에게 현진영은 아마도 ‘흐린 기억 속의 그대’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시행착오를 교과서로 삼는 사람이다. 숱한 실패를 깨진 유리가 아니라 거울로 삼은 게 주효했다. 한국 나이로 70인데 여전히 앞으로 계획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이수만이다. 과거완료가 아닌 현재진행. 20년 전에 이수만은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나 혼자 꿈을 꾸면 한낱 꿈이지만 우리 모두가 꿈을 꾸면 그것은 새로운 미래의 시작이다.”
세상엔 산이 있으니 산에 올랐다는 사람도 있고 길이 있으니 길을 떠났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산은 험준하고 길은 구불구불하며 곳곳에 수렁도 있다.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한 사람도 있고 그냥 피해간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지치지 않고 간 사람들이 있기에 길이 조금 더 넓어진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두운 면도 없지 않았다. 아이돌을 공장에서 찍어낸다는 비난도 있었고 돈 되는 것만 시장에 내놓는다는 지적도 있었다. 노로바이러스가 세상을 어지럽힐 때 나는 예능계에도 ‘노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노예와 로봇이다. 그것만은 되지 말아야 한다. 청소년을 마주하는 아이돌 기획사는 기업 마인드에 교육 마인드도 반드시 포함하는 게 좋을 듯하다.
지금 세계가 주목하는 기획사 중 하나는 방시혁의 하이브(HYBE)다. 기획사를 넘어 ‘음악에 기반한 엔터테인먼트 라이프스타일 플랫폼기업’이다. 방탄소년단을 키운 방시혁이 서울대 졸업식(2019) 축사를 통해 자신의 행복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우리 회사가 하는 일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특히 우리의 고객인 젊은 친구들이 자신만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것’이라는 그 다짐에서 미래의 아이돌 산업이 나아가야 할 작은 희망을 읽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