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앤 라이드? 도로 표지판 뜻 알겠습니까”

입력 2021-07-22 04:03 수정 2021-07-22 04:03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쉬운 우리말 쓰기는 국민 생활 편의는 물론이고 안전과도 직결되는 일”이라며 우리말 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글문화연대 제공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 시민단체 사람들이 모인 회의에서 이 단어가 나왔을 때 이건범(57)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당황했다. 알 듯 말 듯한 단어의 의미가 자꾸 신경쓰여 대화에 참여할 수 없었다. 책상 밑으로 스마트폰 검색이라도 했으면 나았겠지만 시각장애인인 이 대표에게는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회의를 마치고 찾아보니 회의 진행 보조나 도우미 정도로 번역하면 충분히 의미가 전달될 단어였다. 한국어를 공용어로 쓰는 사회에서 외국어 때문에 초라해졌던 경험이었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경험이 됐다”고 이 대표는 당시를 떠올렸다.

서울 마포구 한글문화연대 사무실에서 21일 만난 이 대표는 민주주의 사회 시민들의 인권, 그리고 알 권리의 관점에서 쉬운 우리말 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공공언어는 보편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단어로 만들어져야 하며 언어의 장벽 탓에 개별 시민들이 자신의 권리에 대해 의견을 내는 일을 꺼리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학창 시절 운동권이었던 이 대표가 국어운동에 나서게 된 계기는 민주화 운동으로 수감 생활을 하다 만난 이들의 영향이 컸다. 당시 이 대표와 같은 방을 쓰던 이들은 소매치기 범죄 등을 저질러 감옥에 온 ‘잡범’들이었다. 어려운 법률 용어로 가득한 공소장 탓에 자신이 어떤 이유로 재판을 받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다. 1심 판결문을 보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이 대표는 항소이유서를 대신 써준 적도 있다. 공공언어에 접근하지 못해 자기 방어권을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이 대표는 “‘어려운 언어라는 게 누군가에게는 1년짜리 징역살이를 3~4년으로 늘릴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가 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며 “쉬운 공공언어는 한 인간의 존엄과 알 권리와 직결된 문제”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어려운 공공언어가 초래하는 행정력 낭비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시민 개개인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정책들에 대한 관심도를 줄이거나 애꿎은 민원만 늘려 행정의 효율성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철도역 앞 도로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키스 앤 라이드(Kiss and Ride)’ 표지판은 한글문화연대가 바꾸기 위해 애썼던 잘못된 공공언어의 예다. 키스 앤 라이드는 승용차를 타고 역에 도착한 상황에서 운전자는 내리지 않고 같이 타고 온 여행자만 환승을 위해 하차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헤어질 때 입을 맞추며 배웅하는 영어권 문화에서 유래됐다. 한글문화연대는 키스 앤 라이드를 쉽고 의미가 명확한 우리말 ‘임시정차구역’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 대표는 “쉬운 우리말 쓰기는 국민 생활 편의는 물론이고 안전과도 직결되는 일”이라며 “공무원 등 정책 입안자들이 자신들의 정책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로 외국어를 남용하는 것은 정보의 민주화라는 차원에서 자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