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아직 세상은 살 만했습니다.”
지난해 5월 22일 국민일보 지면에서 유독 눈길이 가던 짧은 문장이었다. 전 세계를 장악한 코로나바이러스가 불안과 염려도 함께 퍼뜨리고 있을 때다.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희망찬 메시지를 불러냈을까.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곳’이란 탄성을 끌어낸 계기는 유기동물 기획 취재 ‘개st하우스’에 소개된 한 감동적인 사연이었다. 어느 펫숍에 강아지 두 마리가 버려졌고, 암컷인 강아지들이 강아지 공장에 번식견으로 팔려 갈 것을 걱정한 사람들이 80만원을 모금해 강아지들을 구해냈다. 이 이야기를 접하고는 세상에 더 대단한 선행도 많은데 기자가 웬 호들갑이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 정도 돈과 관심, 네트워크라면 동물보다 주위의 가난한 사람부터 도와야 한다는 목소리도 분명 있으리라.
지난 몇 년간 반려동물이 급격히 늘어나며 이와 관련된 사회적 갈등과 문제도 덩달아 증가하고 있다. 언론에 개 물림 사고가 종종 보도되고, 이런저런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펫티켓’이라 불리는, 동물과 공존을 위한 예절을 정착하려는 고민도 적지 않다. 이런 노력 덕분에 이전보다 개선된 반려동물 문화가 형성되고 관련 법률도 나오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절대 바뀌지 않을 가슴 아픈 현실이 있음은 잊지 말자. 어떠한 긍정적 변화가 일어나든 우리 주변의 많은 동물은 계속 학대당할 것이고, 지구촌 곳곳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전쟁과 재난, 질병과 가난으로 고통받을 것이다. 이 비극적 현실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동물의 고통이든 인간의 고통이든 모두 우리가 속한 세계의 일부를 구성할 뿐이다.
사람 생명보다 귀한 것이 없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공통된 가르침이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창조했기에 생명 모두가 귀하다는 걸 믿는 사람이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건 감히 우리가 생명에 경중을 매길 수 없음도 의미한다. 물론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이것 대신 저것을 선택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선택에서 밀린 생명체가 덜 중요하고 하대받아도 된다는 건 아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는 말씀처럼, 일상에서 지극히 작은 생명을 대하는 방식은 이웃과 관계 맺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세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앞서 언급한 “하지만 아직 세상은 살 만했습니다”라는 말의 의미를 되짚어봤으면 한다. 세상은 단지 사람들이 강아지 두 마리를 구해냈기에 살 만한 곳이 된 게 아니다. 우리 사회가 작은 생명도 존중받을 수 있고, 생명을 구하고자 대가 없이 희생을 감수하는 평범한 사람이 있기에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다. 폭력이 만연한 현실에도 생명을 살리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졌기에 세상은 죄로 멸망하지 않고 지금도 존재한다. 고향을 상실한 난민이든, 생활고로 고통받는 이웃이든, 말 못 하는 동물이든 하나님께서 창조한 생명을 보호하는 이야기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들려오기에 ‘아직 세상은 살 만한 곳’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칠흑 같은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오신 생명(요 1:4)의 이야기다. 지난 2000여 년간 인류는 생명의 빛에 대한 복음의 이야기에 생명을 살리는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접붙여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밝혀 왔다.
끝으로 이 자리를 빌려 유기동물의 생명을 보호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지난 1년간 꾸준히 들려준 국민일보에 ‘개st 하우스’ 독자이자 지구인의 한 명으로서 고마움을 표한다.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