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대의’ ‘이례적인’ ‘드문’ ‘최초의’….
고 이건희 삼성 회장 유족이 지난 4월 말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 중 엄선된 명작을 보여주는 특별전이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과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21일 동시에 막이 오른다. 하루 앞서 20일 언론에 사전 공개된 이건희 컬렉션은 미술품마다 이런 수식어와 사연을 품으며 여름을 강타할 명작의 향연을 예고했다.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금속 도자기 토기 전적 서화 목가구 등 다양한 장르의 2만1600여점을 받은 국립중앙박물관은 명품 45건 77점(국보·보물 28건 포함)을 가려 뽑았다.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는 제목으로 열리는 전시는 국보와 보물이 즐비해 실물로 보니 ‘명품 중의 명품’임이 실감이 났다. 스토리를 갖춘 전시 구성까지 더해져 재미와 감동을 준다.
충남 덕산(예산) 출토품으로 추정되는 기원전 3∼4세기 ‘초기 철기 청동방울’(국보 제255호)은 포탄형 팔주령 쌍두령 등 ‘5종 세트’를 갖췄다. 현존 청동방울은 적지 않지만 이렇게 세트를 갖춘 것은 극히 드물다. 고려 13세기의 ‘청자상감모란무늬발우와 접시’(보물 제1039호)도 4개 1세트로 구성됐다. 강경남 학예사는 “보통은 1개씩 나온다. 1000년이 넘은 고려청자가 이렇게 세트로 보존되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기증 덕분에 딱 1점 보유하게 된 ‘천수관음보살도’(보물 제2015호)와 2점으로 늘게 된 ‘수월관음도’도 나란히 걸렸다. 고려불화는 전 세계에 100여점 남짓 존재하고 국내에는 20점이 안 될 정도로 귀하다.
삼성가 고미술 컬렉션의 아이콘이었던 겸재 정선(1676~1759)의 ‘인왕제색도’(보물 제216호)와 단원 김홍도(1757~1806?)의 말년의 비애가 담긴 ‘추성부도’(秋聲賦圖·보물 제1395호)가 같은 공간에 전시됐다. 조선시대 최고 화가 두 사람의 기량을 엿보며 사연에도 귀기울이게 된다. ‘인왕제색도’는 정선이 76세에 그린 최고 걸작으로 시인 이병연과 우정이 깃들어 있다는 설, 이웃 지인인 문인 이춘재의 주문을 받아 그렸다는 설 등이 있다. ‘추성부도’는 김홍도가 61세에 생애 마지막으로 그렸다. 중국 송나라 문인 구양수의 동명 시를 형상화해 쓸쓸한 마음을 실었다.
18세기 백자 두 점 ‘백자청화산수무늬각병’(국보 258호)과 ‘백자청화산수무늬병’(보물 제1390호)은 당시 문인들의 아취를 보여주려고 일부러 강세황의 문인산수화를 배경 삼아 디스플레이했다.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당대 최고의 기술과 디자인을 보여주는 명품들로 컬렉션은 기술혁신과 디자인을 중시한 기증자의 경영철학과 닿아있다”고 밝혔다.
총 1488점을 기증받은 국립현대미술관은 작가 34명의 주요 작품 58점을 뽑아서 ‘한국미술명작’이란 제목으로 선보인다. 채용신(1850~1941) 이상범(1897~1972) 변관식(1899~1976) 김환기(1913~1974) 박수근(1914~1965) 이중섭(1916~1956) 장욱진(1918~1990) 유영국(1916~2002) 천경자(1924~2015) 등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작가들 위주로 선정했다.
전시 들머리는 나혜석에 이은 두 번째 여성 서양화가 백남순(1904~1994)이 그린 서양화 대작 ‘낙원’(1936년)과 청전 이상범의 동양화 ‘무릉도원’(1922년)를 대비시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상범이 청록산수풍으로 그린 이상향이 후배 서양화 세대에 의해 수용되고 변화됐음을 보여준다. 전시의 백미는 김환기의 대작들이다. 반구상 형태의 ‘여인과 항아리’는 1000호(가로 6m)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벽화로 전시장을 압도한다. 우리 근대미술사에서 유례없는 대작인 이 작품은 1950년대 국내 최대 방직 재벌 삼호그룹 정재호 회장이 자택 벽화용으로 주문했다고 한다. 다른 대표작 ‘산울림’도 가로 2.6m 점화 대작이다. 김환기의 아이콘인 대형 점화를 이번 기증 덕분에 1점 보유하게 돼 국립현대미술관으로서 체면을 차릴 수 있게 됐다. 장욱진이 일제강점기 양정고보 재학 중 조선일보 주최 전국학생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최고상을 받은 작품 ‘공기놀이’와 이 작품을 좋아해 처음 소장했던 화가 박상옥의 비슷한 작품이 나란히 걸렸다. 세기의 기증이 갖는 취지를 살리려는 듯 곳곳에 곁들인 컬렉터 스토리도 이번 특별전의 관전 포인트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