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피난지 부산에 세워진 대표적인 기독병원 두 곳이 있다. 고신대 복음병원과 일신기독병원이다. 복음병원은 1951년, 일신기독병원은 1952년 설립돼, 올해와 내년 각각 70주년을 맞는다. 전시에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해 세워진 두 병원을 상징하는 인물이 있다. 장기려(1911~1995)와 호주선교사 매혜란(Helen P Mackenzie, 1913~2009)이다.
같은 지역에서 동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의 삶과 신앙은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비슷한 결을 가진다. 두 사람 모두 이주민이었다. 장기려는 ‘서북단 땅끝 평북 용천’으로부터 가족과 헤어진 채 낯선 피난지 부산에서 평생을 살며, 복음병원에서 초대원장으로 사반세기(1951~1976)를 헌신했다. 매혜란은 ‘동남단 땅끝 부산’을 찾은 호주선교사 부모의 장녀로, 부산에서 태어나 조국 호주로 돌아갈 때까지 일신기독병원 초대원장으로 사반세기(1952~1976)를 일했다.
장기려와 매혜란은 소외된 이웃을 편견 없이 섬겼다. 장기려는 이산가족의 아픔을 지닌 채 평생을 살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진료와 복지제도를 마련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매혜란은 한센병 환자 치료에 헌신한 부친의 영향을 받아 호주에서 산부인과를 전공한 후, 6·25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의료선교사로 부산으로 돌아와 높은 사망률로 고통받던 산모들과 영아들을 위한 의술을 펼쳤다.
두 사람 모두 긍휼함과 비전을 지닌 기독교인이었다. 돈보다는 생명이 우선이었다. 이들 병원에 오면 설령 돈이 없더라도 치료받을 수 있었다. 장기려는 가난한 이들도 안정적으로 질병 예방과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오늘날의 의료보험과 유사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해 운영했다. 환자가 치료비 지불 능력이 없으면 자비로 대신 대납해 준 경우가 많다. 매혜란도 다르지 않았다. 일신기독병원 맥켄지 역사관에는 무료로 치료받은 환자들의 진료기록이 수북이 쌓여 있다. 매혜란은 은퇴 전 호주 전역을 버스로 이동하며 후원금을 모아 기금을 조성했다. 그는 병원을 찾는 이들이 부유하든 가난하든 예수 정신으로 돌보기를 소망하며 병원을 떠났다.
이들은 신앙과 실력을 겸비한 최고의 의료 전문가이기도 했다. 장기려는 국내 처음으로 간암 환자의 대량 간 절제술에 성공하는 등 외과적 전문성과 사회적 공헌을 인정받아 막사이사이상을 비롯한 국내외 다수 상을 받았다. 매혜란은 산모와 영아 건강의 질을 높인 공로로 대영제국 유공자에게 주는 상과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했다.
장기려와 매혜란은 개인적 재능 발휘를 넘어 미래지향적이고 융합적인 협업을 실현했다. 장기려에게는 복음병원과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위해 함께 헌신했던 한상동 전영창 채규철 같은 동역자들이 있었으며, 매혜란에게는 평생의 동역자였던 동생 매혜영(Catherine Mackenzie, 1915~2005)을 비롯해 동료 선교사들과 후원자들이 있었다.
장기려와 매혜란은 선각자들이었다. 선각자의 여정은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다. 그 이유는 만약 이들의 시도가 성공한다면 수많은 사람이 그 길을 따라올 것이고, 만약 이들의 시도가 실패하더라도 실패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하나 줄여준 것이니 이 또한 성공적이기 때문이다.
장기려와 매혜란은 고향과 조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6·25전쟁의 피난지 부산에서 동시대를 살았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본향을 선취한 기쁨으로 “담대하게 거침없이”(행 28:31) 데칼코마니처럼 행동했던 동시대의 선각자들이었다. 오늘 코로나19 역병의 세상, 더 많은 장기려와 매혜란의 데칼코마니들이 기다려진다.
탁지일(부산장신대 교수·현대종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