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TV 오리지널 ‘찐경규’를 연출하는 권해봄(35) PD는 본명보다 ‘모르모트’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실험용 쥐라는 뜻인데,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마리텔)을 연출할 때 스포츠댄스 격투기 걸그룹댄스 등에 시청자 대신 도전해 웃음을 선사하면서 붙은 애칭이다. 권 PD는 ‘찐경규’에서도 이경규와 티격태격하며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PD ‘본캐’까지 여과 없이 드러내며 시청자들에게 다가서고 있다.
권 PD는 1세대 ‘참여형 PD’다. 카메라 뒤에서 방송을 기획하고 지휘하며 권위적으로 비쳤던 PD의 위치를 카메라 앞으로 옮겼다. 권 PD는 13일 국민일보와 화상 인터뷰에서 “제가 방송에 비칠 때 외모나 키가 평균 이하라고 많이 생각하던데, 사실은 평균 한국 남성과 비슷하다”는 말부터 꺼냈다. 그는 PD인데도 방송인이나 연예인의 외모와 비교되곤 해 체구가 작고 평범하다는 인상을 줬다. 하지만 아무런 분장 없이 정제되지 않은 모습으로 방송에 등장한 게 오히려 시청자들의 호감을 샀다.
권 PD는 “PD가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장점이 많다. 촬영 때뿐만 아니라 기획 때부터 대본이나 구성이 머릿속에 있어 출연자에게 캐릭터를 부여하기 쉽다”며 “마리텔에서 무서운 선생님 앞에선 겁먹은 모습으로, 종합격투기선수 김동현 앞에선 겁먹기보다 같이 때리며 맞서는 모습으로 상대의 캐릭터를 살리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인터넷 방송 포맷을 지상파 예능에 처음 도입한 마리텔에선 시청자들과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권 PD는 시청자들을 대신해 직접 도전하고 체험하는 장면으로 그 묘를 살렸다.
권 PD가 카카오엔터테인먼트로 이적한 후 첫 메인 연출을 맡은 ‘찐경규’에선 예능인 이경규를 도드라지게 하려고 PD로서 모습 그대로를 카메라에 드러낸다. 마리텔에서보다 한 발 더 나간 것이다. 이경규의 ‘찐’(진짜) 모습을 보여준다는 취지 말고는 아무런 콘셉트도 정해져 있지 않아 매회 기획하는 게 하나의 콘텐츠가 됐다.
권 PD는 “직접 회의를 하면서 저와 이경규 선배가 매회 프로그램 아이디어를 내고 아이템을 겨루는 모습이 다 카메라에 담긴다”며 “이경규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쎈캐’지 않나. 선배는 화도 잘 내고 경력도 오래되고 안목도 좋다. 저는 모든 걸 통솔하는 PD이긴 하지만 입봉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경규 선배와 대적했을 때 질 것 같은 모습으로 웃음 포인트를 만들었다”고 전했다. 새로운 아이템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예능인 이경규의 진짜 모습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다.
매번 새로운 시도를 하다 보니 새 에피소드마다 권 PD의 역할이 달라졌다. 이경규의 영화 인생을 조명할 때는 권 PD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VJ와 나레이션을 동시에 했다. ‘엥그리하우스’ 편에선 이경규가 화를 낼 때마다 퇴근 시간이 1시간씩 늦춰지는 설정을 해놓고 이경규가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며 설계자와 관찰자의 위치에 섰다. 권 PD는 “첫 미팅 때부터 이경규 선배와 만난다는 것 말고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었다”며 “그래서 프로그램이 유기체 같다는 말을 하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경규 선배는 ‘찐’을 원한다. 모친상을 당하고도 방송을 쉬지 않고 그대로 보여줬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겠다고 약속한 방송 취지와도 맞는다고 했다”며 “이런 게 이경규 선배의 예능인으로서 자긍심이라고 생각한다. 선배가 예전에 출연료를 못 받는 상황에서도 촬영을 이어가며 ‘내 일인데 돈을 못 받는다고 멈추면 시청자들과 약속을 저버리는 셈’이라고 말했다는 데서 감명받았다. 예능인 40년에 ‘짬바’(오랜 경력으로 풍기는 분위기)가 있다”고 전했다.
이경규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자는 ‘찐경규’에서도 ‘부캐’가 주도하는 예능 트렌드를 따라가려는 시도가 있었다. 권 PD는 “‘미스터리 인턴’ 편에는 이경규가 카카오 엔터에 인턴으로 들어왔다는 설정이 담겼는데, 촬영은 재밌었는데 선배가 힘들어하더라. ‘나이가 60인데 인턴으로 왔다는 설정이 말이 되냐’고 토로했다”면서 “부캐 연기를 정말 어색해한다”고 말했다.
권 PD는 프로그램 기획 당시 ‘찐’이라는 소재를 갖고 다른 사람과 조합을 꿈꿨다. 그는 “예를 들어 조세호씨랑 하면 ‘찐세호’가 된다. ‘쎈캐’로 유명한 최민수씨와도 해보고 싶었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이경규 선배와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다채로운 이야기가 나왔을까 싶다”고 돌아봤다.
‘찐경규’가 예능인 이경규의 삶을 이토록 고스란히 내보일지는 아무도 몰랐다. 권 PD는 “처음에는 매회 새로운 시도를 하자는 취지만 있었는데, 하다 보니 ‘이경규의 인생 예능’이 됐다”며 “지인들과 술 한 잔 기울이며 고민을 듣는 ‘취중찐담’에선 이경규 선배의 인간관계와 어른으로서 혜안이 드러난다”고 밝혔다. 또 “영화 투자 이야기에선 이경규 선배가 영화 투자로 돈을 엄청나게 날리고 까먹은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도 ‘영화를 할 때 내가 살아있다고 느낀다’고 말하는 모습에 꿈에 도전하는 모습이 녹아있다”고 말했다.
권 PD는 따뜻하면서도 웃음이 나는 예능을 할 때 살아있다고 느낀다. 특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이경규가 딸 예림씨 결혼을 앞두고 함께한 술자리 에피소드다. 그는 “이경규 선배가 딸에게 ‘소떼와 양떼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사는데 너의 비빌 언덕은 아빠였으면 좋겠다’고 한 말에 감동한 딸들이 많더라. 그걸 보고 아빠한테 전화했다는 말을 듣고 뿌듯했다”며 “제가 만드는 콘텐츠가 세상을 크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작은 동기부여라도 된다면 행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꿈이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새 젊은 세대가 꿈을 갖기가 힘든데 꼭 직업이 아니라도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자문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중학생 때 ‘이경규가 간다’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공익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PD를 꿈꿨는데, 대학 때 언론고시를 뚫을 자신이 없어서 도전도 안 하고 백화점에 취직했다”며 “농산팀에 배치됐는데 ‘도전했다가 실패하는 게 무서워 도전도 안 해보고 쌀을 팔고 있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작은 방송사부터 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SBS Plus에서 예능PD 인턴으로 시작한 25세 청년 권해봄이 CJ ENM과 MBC를 거쳐 카카오엔터테인먼트까지 오는 동안 10년이 흘렀다. 그는 “더 큰 플랫폼에서 더 젊은 콘텐츠, 일상 속에 더 녹아드는 콘텐츠를 만드려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다”며 “‘찐경규’에선 한 번도 안 해본 걸 매번 ‘파일럿’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느낌으로 도전한다. 요즘 웃을 일이 많이 없으실 텐데 20~30분 동안 신나게 웃게 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