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부터 심상치 않다. 유머를 멋지게 구사하면서도 과장되지 않은 이야기, 경쾌하고 따뜻하게 진심을 전하는 언어, 소박하고 단단한 통찰. 책날개에 적힌 저자 소개를 찾아보게 한다. “16년째 검사”라고 적혀 있다. 첫 번째 글 ‘털 있는 것들의 비극’을 읽고 나서 ‘정명원 검사’를 검색해봤다. 관련 기사는 없다. 검사로서도 작가로서도 무명이다.
두 번째 글을 읽으며 또 한 번 놀라고, 세 번째 글까지 읽고 나면 확신이 생긴다. 이 책을 끝까지 다 읽게 되겠구나. 정명원이란 작가를 앞으로 주목하게 되겠구나.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은 대구지검 서부지청 부부장으로 재직 중인 여성 검사 정명원의 첫 책이다. 검사 생활 에피소드를 소재로 한 이 책은 ‘법조인 작가’의 계보를 이을 ‘검사 작가’의 등장을 알린다.
40대 초반의 여성 검사 정명원이 들려주는 검사 이야기는 낯설다. “중년 남성들이 구사하는 궁서체 같은” 검사 이야기가 아니다. 뉴스가 주로 다루는 거악과 싸우는 검사들은 이 책에 나오지 않는다. 서류에 파묻혀 사는 형사부와 공판부 검사들, 법정에서 우는 울보 검사들, 지방에서 근무하는 검사들, “새파랗게 젊은” 여성 검사들을 보여준다. 책을 읽다 보면 남성적·권위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검사의 이미지가 허물어진다.
저자는 “직업을 나타내는 어떤 이름 안에 원래의 자아와 직업적 자아를 매치시키기 위해 부단히 흔들리고 있는 어떤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잘 보지 않는다”면서 “늘 너무 무심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형사법정의 한편에서 남몰래 울음을 삼키는 울보 검사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한 번쯤은 이야기하고 싶었다고나 할까”라고 썼다.
그런 점에서 검사 출신인 김웅 국민의힘 의원이 쓴 ‘검사내전’이나 판사 출신인 문유석 변호사의 ‘미스 함무라비’처럼 드라마로 만들 정도로 서사가 강한 판·검사 이야기들과 장르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책은 검사 이야기지만 한 검사가 쓴 직장생활 이야기로 보는 게 더 적절하다. 소심한 자유주의자 여성이 권위적이고 경쟁적인 직업세계 속에서 자기의 영역과 목소리를 어떻게 개척해 나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로서 강렬한 힘을 갖고 있다.
저자는 검사와 자유인이라는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구도를 상정하고 검사 일을 하면서도 자유인으로 살아가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검사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후 자신의 자유를 확장하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운다. “끝끝내 자유인인 검사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쉼 없이 자유의 향방을 묻는 검사가 될 수 있다면, 그것도 꽤나 멋진 일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일단 두 가지를 실천하기로 한다. ‘하기 싫은 말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웃기지 않은 말에는 웃지 않는다.’ 삶의 어떤 지점을 자기의 힘으로 통과한 이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성숙한 관점이 있다.
일하는 엄마로서 갖는 보육에 대한 자책감 역시 그를 괴롭혀온 문제였다. 그는 “엄마가 아이에게 주어야 할 것, 줄 수 있는 것이 다만 보육자로서의 역할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결국 내가 딸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은 삶의 태도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한 사람의 어른이 자신의 직업을 어떻게 대하고 꾸려나가는지, 사회와 어떻게 반응하고 소통하는지, 인생에서 닥치는 문제들을 어떤 원칙을 가지고 풀어나가는지를 아이는 엄마의 삶을 지켜보며 자연스레 배우고 익히게 된다.”
직업인으로서 성공에 대해 계속 질문하고, 일과 직업의 중압감 속에서 개인을 지켜내기 위해 다듬어온 생각들은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을 이룬다. 검사는 출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안에도 중심과 변방이 있다. 저자는 여성이고 지방대 출신에 “검찰에서도 내내 중심이라고 할 수 없는 형사부 공판부에서 일했고, 공판부 중에서도 주로 꺼려하는 국민참여재판을 전문으로 하고 있”으며 대구에 산다.
저자는 자신이 선 자리를 외곽으로 표현하면서 튀지도 빛나지도 않게 최선을 다해 외곽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옹호하고 그들이 만들어낼 새로운 가치에 주목한다.
“중심의 질서가 우리를 루저라고 부르든 뭐라고 부르든 별 상관없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 내가 보람과 편안함을 느끼는 일이 무엇인지를 망설임 없이 찾아 나서는 일 말이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