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1장 1조다. 1948년 7월 17일 공포돼 오늘에 이른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사상을 담은 이 한 줄의 천부의 권리를 얻기 위해 무수히 피를 흘렸다. 전근대의 견고한 신분 질서 사회는 자유와 평등을 억압했다. 짐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제헌 헌법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한 법통을 이어받았음을 명시했다. 8차에 걸친 개정을 통해 4·19 민주이념 계승 등을 담았다. 헌법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는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어로 된 이 헌법을 갖기 전까지 제국의 언어에 지배를 받았다. 한글 창제라는 언어혁명을 이뤄 놓고도 한어(漢語)가 공식어였다. 이어 제국주의 일본어가 법적 효력을 가졌다. 광복 직후 태평양 미국 육군총사령부 포고 제1호는 ‘영어를 모든 목적에 사용하는 공용어’로 명시했다. 생활어와 공식어가 달랐다. 이 이중언어 사회에서는 국민에게 주권이 있을 수 없다.
제헌 헌법 공포로 드디어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지닌 대한민국 국민이 등장했다. 불과 73년 전 일이다. 그렇다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모토가 되는 자유와 평등의 개념은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 일제에 의한 근대화 개념이라고 하겠지만 그들은 눈곱만큼도 조선인에게 자유와 평등사상을 심어줄 의사가 없었다. 단어에 불과했다.
이 자유와 평등은 기독교적 세계관이다. 우리 한국사는 기독교 문명 전래에 따른 기독교의 한국 근현대사 기여 기술에 대단히 인색하다. 교과서에서도 간략히 넘어간다. 그러나 1885년 선교사들의 입국과 함께 교육과 의료 선교가 본격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이 전해졌고 예수 그리스도 정신의 핵심인 자유와 평등사상이 퍼졌다. 백성은 한글 쪽복음을 읽고자 ‘언문’을 배웠고 이로 인해 인식이 트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사대부를, 모펫 선교사는 민중을 중심으로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함’을 전했다. 19세기 제국주의의 대항해 시대 때 식민지 개척을 위해 ‘총을 든 군인과 성경을 든 선교사’가 피식민지를 굴복시키는 일반적 행태를 겪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었다. 그만큼 축복받은 나라였다.
한국 기독교는 초기(1885~1919) 개화와 항일 투쟁으로 민족의 수난 속에 십자가를 멨다. 3·1운동 후 일본의 강압이 거세지자 계몽운동으로 민중과 함께했다. 일제 말기 비록 훼절 등도 있긴 했으나 민족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순교를 마다하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또 광복과 6·25전쟁 무렵 구제와 구호의 징검다리가 됐다. 군사독재 시기에는 십자가의 양심으로 약한 자와 갇힌 자를 대변하고 돌봤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법전편찬위원이었던 법철학자 최태영(1900~2005) 선생은 황해도 출신으로 모태 신앙인이었다. 동향의 김구 이승만과 교유가 깊었고 그들 또한 기독교 교육 수혜자여서 자유와 평등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데 친일파 등용 등으로 권력을 잡은 이승만이 ‘국회에서 대통령을 탄핵할 수 없다’는 법조문을 집어넣게 했다. 헌법 기초분과위원회에서였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시절 안창호에 의해 탄핵받은 바 있다. 최태영 선생은 예수 정의를 외면한 사심 섞인 독소 조항이었다고 했다.
한국 근현대사에 빛과 소금이 됐던 한국교회가 ‘첫 마음의 법’을 잃고 심하게 흔들린다. 이스라엘 민족이 십계명을 돌판에 새겼을 때는 이미 늦었을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양심의 법 제헌’이 필요하다. 최태영 선생이 생전 이렇게 말했다. “법이란 전혀 없는 것보다 아쉽고 약간 잘못된 부분이 있다 해도 만들어서 다 같이 질서를 잘 지켜 잘 살기 위한 목적에 부응하는 것이라야 한다. 법을 적용할 때도 해석을 잘해야 함은 물론이고 시행할 때도 정의와 일반의 행복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전정희 종교부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