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8월 4일 저녁 엄청난 방송사고가 MBC에서 발생했다. 아마 그 시간에 TV를 보던 시청자라면 지금도 잊지 못할 장면으로 기억할 것이다. ‘뉴스데스크’ 스튜디오에 더벅머리 청년이 느닷없이 나타나더니 ‘귓속에 도청장치가 들어있습니다. 여러분’이라고 반복해서 외친 후 거주지 주소와 이름을 밝힌 사건이다. 시작에서 끝까지 채 5초도 걸리지 않았다.
본인에겐 현장진입이었지만 방송사로선 괴한난입이었다. 이 화면은 ‘응답하라 1988’(tvN)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당시 앵커의 차분한 대응도 인상적이었다. ‘뉴스 도중에 웬 낯선 사람이 들어와 행패를 부렸습니다마는’ 그리고 별일 없었다는 듯 뉴스는 차질 없이 이어졌다.
그날 이후 방송사 경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낯선 사람, 낯익은 사람 가릴 것 없이 가슴에 증명서를 달아야 출입이 가능해졌다. 직원은 사진이 붙은 신분증, 외부인은 입구에서 신고 후 출입증을 받아야 했다. ‘저 아시잖아요’ 같은 애교나 친분 작전은 일절 안 통했다. 뒷모습만 봐도 알 수 있던 뽀식이(코미디언 이용식)도, ‘장학퀴즈’의 베테랑 아나운서(차인태)도 보안요원의 지시에 따라야만 했다.
때마침 지난 12일 월요일 ‘아침마당’(KBS1TV)의 주제는 ‘집 나간 아나운서’였다. 전직 방송사 아나운서 5명(왕종근 김병찬 김현욱 김일중 오정연)이 게스트로 출연했다. 진행자는 현직 아나운서(김재원 김솔희)였다. 출연자 중 일부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다시 ‘집’에 돌아오고 싶다 호소(?)했고 고정패널 이용식은 ‘저 사람들이 우리 밥그릇을 뺏으려 한다’며 엄살을 부렸다.
아나운서 지망생이라면 누구나 방송사신분증을 부러워할 것이다. 반대로 직장인 아나운서는 선망의 눈으로 프리랜서 방송인을 바라볼지 모른다. 아나운서의 신분증이 다시 출입증으로 바뀌면 무엇이 달라질까. 1980년대에 집 나간 아나운서라고 하면 진짜 집을 나서 방송사에 출근하는 직장인을 연상했겠지만 지금 ‘집 나간 아나운서’는 방송에 출연하는 프리랜서를 가리킨다. 각각 빛과 그림자가 존재한다. 직장인은 조직의 명을 따라야 하는데 프리랜서는 본인의 뜻에 따라 프로를 고른다. 직장인은 월급을 받는데 프리랜서는 출연료를 받는다. 여기서부터 과정이 매우 다양하다. 출연료를 받으려면 먼저 섭외를 받아야 하는데 이게 장난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프로에 내가 출연할 수 있는 경우는 극소수다. 그야말로 생존경쟁이다.
대다수의 프리는 낮에 자유롭고 밤에 배고프다. 예전에 그 차이를 동물원과 정글에 빗대서 말한 적이 있다. 동물원의 동물은 그냥 가만히 있어도 먹고는 산다. 사육사가 제시간에 월급, 아니 먹이를 가져다준다. 단, 움직이는 영역이 제한되고 창살 앞에선 이따금 사람들이 기웃거린다. 정글에선 마음껏 옮겨 다닐 자유가 있는 대신 언제 먹힐지 모를 공포도 상존한다. 스스로 먹을 걸 찾아야 하는데 경쟁자가 워낙 많다. 영역 표시를 해두어도 소용이 없다. 새로운 강자가 나타나면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
관객(시청자)의 입장은 느긋하다. 출연자가 소속이 어디든, 그가 신분증을 소지하든 출입증을 지참하든 개의치 않는다. 지루하다 느끼면 리모컨으로 끄거나 숫자를 바꾸면 그뿐이다. 시청자의 즐거움엔 끝이 없지만 프리랜서의 안정성엔 끈이 없다.
누가 집(방송사)에 들어가는가. 누가 들어갈 수 있는가. 본인이 원하고 회사가 원해야 한다. 시청자가 선호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사람을 뽑아야 방송사가 유지될 것이다. 그래서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준비된 사람이 뽑힌다. 라디오 시대엔 목소리가 좋고 상식 풍부한 사람이 우선이었다. 정보전달력이 최우선이었기에 뉴스와 교양프로를 넘나들던 차인태(1944년생)는 아나운서를 언어운사(言語運士)라 부르기도 했다.
TV로 바통이 넘어온 후엔 비주얼 요소가 추가됐다. 미인대회 출신이 아나운서 입사에 유리한 경우도 생겼다. 연예인과 달리 아나운서에겐 인간적 실수가 허용되지 않았다. 뉴스를 진행하다가 웃으면 그게 징계 사유가 되던 시절도 있었다. 차츰 뉴스는 기자가, 진행은 연예인이 하면서 아나운서의 영토가 급격히 좁아질 위기도 있었다.
그러나 위기는 대체로 기회와 동행한다. 정보와 재미를 동시에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아나테이너(아나운서+엔터테이너)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 지금 방송은 개인의 매력이 능력의 절반인 시대다. 실수해도 매력이 있으면 그 사람은 프로에서 살아남는다. 단, 최후의 선을 넘지 않아야 함은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제 현역프리랜서 아나운서들을 살펴보자. 길게 보면 이 세계에선 중역보다는 현역이고 사장보다는 현장이다. 높은 자리도 좋지만 오랫동안 걷고 달릴 수 있는 낮은 자리가 실은 더 낫다. 아나운서 중 현역 최고령 김동건(1938년생, 호적상으론 1939년생)은 ‘가요무대’를 1985년부터 2003년까지, 중간에 몇 해 쉬었다가 2010년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1963년 동아방송 1기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했으니 내년이면 60년째 활동하는 셈이다. 1985년부터 2002년까지 장장 18년 동안 ‘KBS 가요대상’ MC를 맡기도 했다. 나이에 비해 절대 동안의 소유자이며 한마디로 편안하고 안정된 진행자다. 관리의 비밀은 뭘까. 속이 상하면 겉도 상한다는 것이다. 60년을 모나지 않게, 치우치지 않게 세상과 안전거리를 유지해왔다. ‘이미자 콘서트’의 단골 MC이자 작년 KBS 추석특집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콘서트에서도 그가 인터뷰를 진행했다.
현재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고 있는 아나운서 출신 프리랜서 세 사람은 김성주(1972년생) 전현무(1977년생) 그리고 장성규(1983년생)다. 김성주는 집을 나갈 때(2007년 MBC 퇴사) 모진 시련이 따랐지만 운 좋게 이겨냈다. 사람은 누구나 장점 단점 강점 약점을 지니는데 어느 분야나 비슷하겠지만 단점 약점의 보완보다는 장점 강점의 극대화가 성공의 지름길이다. 그는 MBC 입사(2000년) 전 한국스포츠TV에 입사(1997년)해 3년 동안 스포츠캐스터로 활동했다. 회사가 기울어져 인원이 주는 바람에 하루에 4경기씩 종목 가리지 않고 중계했다고 한다. 3년간 중계한 경기가 1000경기가 넘었고 쉰 목소리로 계속 중계하다 보니 웬만해선 목이 잠기지 않는 특수 성대를 지니게 됐다고 한다. 스포츠에는 시나리오가 별도로 없다. 대본 없는 프로에서 확실한 순발력을 기른 것이다. ‘60초 후에 뵙겠습니다’라는 긴박감 있는 코멘트를 유행시킨 ‘슈퍼스타K’(Mnet), ‘바로바로’로 호기심을 폭발시킨 ‘복면가왕’(MBC),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TV조선)에서 보여준 기초체력과 소양은 일찍이 스포츠 중계에서 다져진 셈이다.
전현무(1977년생)는 풍부한 상식과 함께 외국어 기량이 탁월하다. 영어 중국어가 수준급이다. 무엇보다 시대를 잘 만났다. 촐싹거림, 깐족거림, 방정맞음이 자칫 진상이나 거부감으로 굳어질 수도 있었지만 상대를 불쾌하게 하지 않을 정도의 표정과 처신으로 ‘밉지 않은 밉상 캐릭터’를 구축했다. ‘나 혼자 산다’에서 보여준 궁상인 듯 궁상 아닌 도회적 캐릭터로 KBS 출신으로는 유례없이 2017년 MBC방송연예대상에서 대상도 받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국고교생만담대회에서 우승한 전력이 있는 장성규는 ‘선넘규’(선 넘는 장성규) ‘개나운서’(개그맨+아나운서)로 자신만의 이미지와 캐릭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망가질 듯 망가지지 않고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는 건 그의 품성이 마지노선을 넘어가지 않는 덕분이다. 대중과 오래도록 호흡하려면 썩지 않고 삭아야 한다. 오래 남은 자들에게서 청국장이나 발효유 냄새가 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