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지난 4일까지 공연한 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는 시각·청각·후각을 자극하는 독특한 작품이었다. 공연장에 들어서는 순간 향기가 코를 간질이고 생화와 풀, 이끼에 작은 연못까지 있는 정원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피아노, 플루트, 바이올린, 첼로 사중주의 선율과 새소리, 물 떨어지는 소리, 옷깃에 이는 바람 소리 등이 공연 내내 들린다. 극장에 설치한 60개의 스피커 덕분에 사운드의 향연이 펼쳐진다.
세종문화회관이 연간 1회 선보이는 ‘컨템포러리S’ 무대에 세 번째로 오른 이 작품을 협업한 곳은 1인 제작사 ‘크리에이티브 테이블 석영’이다. 이곳 대표인 석재원 프로듀서(PD)는 최근 “꽃에 물을 주고 분갈이를 하는 등 준비하고 유지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며 “손이 많이 갔지만, 작품이 담고 있는 아름다움이 관객에게 감각적으로 전달돼 고생스럽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의 원작소설을 쓴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의 2017년 희곡을 토대로 했다. 무대를 위한 희곡이라기보다 ‘읽는 희곡’이어서 낭독극 형태의 공연 외엔 이번이 세계 초연이다. 독특한 스타일의 이 작품은 개막 직후부터 화제를 모았다. 크리에이티브 테이블 석영에서 제작한 ‘비 BEA’ ‘내게 빛나는 모든 것’ 등 전작과 마찬가지로 주제나 형식 면에서 관객을 자극했다.
“작품을 선택할 때 저는 직관적인 편이에요. 해외 라이선스 작품인 ‘비 BEA’와 ‘하이젠버그’는 신문이나 SNS 속 작품 사진에서 시작됐습니다. 사진이 작품의 분위기를 보여주잖아요. 이후 대본을 찾아 읽고 리뷰를 검색하죠. 번역가나 에이전트가 작품을 추천하면 관련 자료를 열심히 찾아보고 제가 제작을 잘할 수 있을지 판단합니다. 작품은 좋아도 제 색깔을 내기 어려워 보이면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죠.”
2019년 국내 초연된 연극 ‘와이프’와 2020년 ‘궁극의 맛’은 석 PD가 연출가 신유청에게 추천해 무대화된 작품이다. 석 PD가 제작한 것은 아니지만 신유청은 ‘와이프’로 2020년 백상예술대상 연극상을 받았다. 석 PD는 “내 일처럼 기뻤다. 작품에 대한 내 시선이 나쁘지 않음을 확인해 좋았다”며 웃었다.
유치원 때 세종문화회관에서 연극 ‘피터팬’을 보고 공연계를 꿈꾼 그는 프랑스 유학 후 한국에서 크고 작은 제작사를 거쳤다. 2005년 떼아뜨르 추의 기획자로서 일을 시작했는데, 첫 작품이 웹툰 무대화의 시초가 된 ‘강풀의 순정만화’였다. 뮤지컬해븐에서 기획팀장으로 ‘스프링 어웨이크닝’ ‘메노포즈’ ‘쓰릴미’ 등에 참여했고 엠뮤지컬컴퍼니에서 ‘삼총사’ ‘캐치미이프유캔’의 제작감독으로 일했다. 2016년 안락사 소재의 연극 ‘비 BEA’를 우란문화재단의 100% 지원으로 만들면서 지금의 회사를 설립했다. 2019년 3월 제주도 구좌읍 종달리에 문을 연 국내 최초 극장식 해녀 레스토랑 ‘해녀의부엌’에도 지난해부터 참여하고 있다. 지역 기반의 성공적 스타트업으로 주목받는 ‘해녀의 부엌’은 올해 제주도에 2호점을 낼 계획이다.
2019년 1월 초연된 ‘새닙곳나거든’의 경우 움직임과 소리로 시조를 그려낸 작품으로 석 PD, 배우 지현준, 강양원 연출가, 김시율 음악감독, 임영욱 작가 등 5명이 공동창작했다. 석 PD는 “‘새닙곳나거든’은 하나의 감정에 집중한 작품을 만들고 싶어 시도했다. 몇 달간 다른 4명의 공동창작자와 함께 작품을 고민한 끝에 나온 작품”이라고 말했다.
‘새닙곳나거든’ 등이 보여준 시노그래피는 그에게 콘서트 연출가로 데뷔할 기회도 줬다. 자유로운 창작과 융복합 형태의 전통예술콘텐츠를 지향하는 그림(The林)이 콘서트 연출을 제안한 것이다. 그는 지난 4월 창작국악그룹 그림(The林) 콘서트 ‘블랙무드 여백의 반영’을 연출해 호평을 받았다. 석 PD는 “내겐 창작자들과 이야기해 장점을 빼내는 프로듀서로서 강점이 있다. 인력소개소처럼 어떤 작품에 어떤 창작진이 맞는지 잘 아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석 PD 등 독립 프로듀서들은 국내 공연계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우란문화재단 두산연강재단 등 민간 문화재단이 독립 프로듀서에게 공연 제작 기회를 제공해 성공하면서 세종문화회관 정동극장 등 공공극장에서도 독립 프로듀서와 협업을 통해 성과를 내고 있다.
석 PD는 “공연계에서 독립 프로듀서만큼 개성이 강하면서 발 빠른 사람들이 없다. 다양한 전문 분야를 가진 독립 프로듀서들은 공연계를 풍성하게 만드는 불씨 같은 존재”라며 “독립 프로듀서들이 공연계에서 계속 작업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 장치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