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군인 쓰던 ‘조선의 공중화장실’ 미스터리 풀렸다

입력 2021-07-09 04:05 수정 2021-07-11 17:19
경복궁 동궁 권역에서 조선 시대 공중 화장실 유구가 최초로 발굴돼 8일 언론에 공개됐다. 물을 흘려보내 변을 발효시키는 정화조 구조의 공중 화장실로, 이런 현대식 정화조 유구가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세계적으로도 시기가 가장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은 유구에 변기 틀을 놓았을 때를 추정한 복원 이미지. 문화재청 제공

조선 시대 왕과 왕비, 왕자와 공주 등 왕족들은 용변을 볼 때 도자기로 된 ‘매화틀’(휴대용 변기)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하급관리와 내시·궁녀, 궁궐을 지키는 군인 등 궁궐에 살았던 그 많은 사람은 어디서 배변 욕구를 해결했을까. 그 비밀을 풀어주는 ‘공중 화장실’ 유구가 경복궁 동궁 남쪽에서 발굴됐다. 조선 왕궁의 화장실 유구가 실물로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문화재청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8일 발굴 현장을 언론에 공개했다. ‘경복궁배치도’ ‘북궐도형’ ‘궁궐지’ 등에 따르면 경복궁에는 1∼2칸에서 4∼5칸짜리 화장실 등이 곳곳에 총 75.5칸 있었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관계자가 정화조 발굴 현장을 설명하는 모습. 연합뉴스

이번에 세자 거처인 동궁 근처에서 나온 화장실은 길이 10.4m, 너비 1.4m, 깊이 1.8m의 긴 직사각형 구덩이 형태다. 발판은 사라지고 하부 구조만 남았다. 바닥에는 돌이 깔렸고 바닥과 측면이 닿은 부분은 오물이 새나가지 않게 밀봉토로 막았다. 발굴된 유구가 화장실이라는 건 ‘경복궁배치도’와 ‘궁궐지’ 기록으로 확인된다. 발굴 유구 토양에서도 엄청난 기생충 알(g당 1만8000건)이 검출됐다.

양숙자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연구관은 “4∼5칸 규모로 한 칸엔 가림막을 중간에 두고 발판 2개를 놓아 두 사람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다. 변기 앞에는 옷을 여밀 수 있는 별도 공간을 뒀고 지붕도 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하루 150명이 사용할 수 있는 규모”라고 말했다.

이 화장실 유구는 물을 흘려보내는 정화조 구조라는 점에서 학계를 놀라게 했다. 정화조 내부로 물이 들어오는 입수구 1개와 물이 나가는 출수구 2개를 갖추고 있다. 조선 시대 민가에서는 항아리에 변을 본 뒤 재를 뿌려 발효시키는 방식이 많았다. 경복궁 화장실 유구는 재 대신 물을 투입해 분뇨의 미생물 발효 과정을 가속하는 훨씬 과학적인 방식이다.

이장훈 한국생활악취연구소장은 “물은 미생물이 아주 좋아하는 영양분”이라며 “변이 쌓이면 독성이 생기는데 물을 이용해 변을 발효시킴으로써 악취를 줄이고 부피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래에 쌓이는 침전물은 일꾼들이 따로 ‘푸세식’으로 퍼서 거름 등으로 재활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화장실은 1868년(고종 5년) 경복궁 중건 때 만들어져 20여년간 사용되다 아관파천(1896)으로 경복궁이 제 기능을 잃으면서 사용 중단됐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가 이곳에서 열리며 완전히 훼손됐다.

창덕궁에서 나온 매화틀. 문화재청 제공

정화조를 갖춘 화장실 유구는 백제의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과 고려 말∼조선 초기 양주 회암사 유적에서도 나온 적 있다. 하지만 출수구만 있거나 입출수구가 모두 없었다. 지금과 같은 현대식 정화조 구조를 취한 유적이 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소장은 “유럽과 일본에서는 19세기 말에 들어서야 분뇨와 생활하수를 처리하는 시설이 정착된 만큼 세계적으로도 가장 이른 시기의 정화조 시설”이라고 평가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