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서원했던 아프리카에서 7년 사역을 마친 후 2002년 한국에 돌아왔다. 임신한 아내는 풍토병을 치료받아 완쾌됐다. 그런데 첫째 아이를 출산한 지 한 달이 지났는데 갑자기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병원 응급실로 급히 달려갔다. 아이가 전신 패혈증이라고 했다.
신생아 중환자실에 한 달 동안 입원했다. 그 작은 아이에게 24시간 동안 항생제를 투여했는데 머리카락도 다 빠졌고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의사는 상태가 심해지면 사망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부모 입장에서 정말 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아이 대신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기도하는 중 ‘예수님이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받으실 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이 나왔다.
반복적으로 감사 고백을 하며 눈물로 기도했다. 2시간쯤 지났을까. 하나님께서 고쳐주신다는 마음의 확신이 들었다. 마음의 평안함을 주셨다. 그날 이후 기적같이 아이는 급속도로 호전됐다.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회복됐고 일주일 만에 완쾌됐다.
그때 깨달은 것은 감사는 시점이 중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것도 예수님께서 미리 감사의 기도를 하셨고,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미리 감사의 기도를 하셨던 것이 생각났다.
그동안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감사의 고백을 올려드렸다. 하지만 미리 감사의 고백을 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현실적인 상황을 바꾸어주신다는 영적 원리를 깨달았다.
그동안 선교지에서 고생하고 아이의 병 때문에 고생한 아내가 애처로워 보였다. ‘이제 안식년을 가져야겠다.’ 사실 나에게도 쉼이 필요했다. 그래서 안식년을 보낼 곳을 여기저기 알아본 끝에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선교사님의 도움으로 뉴질랜드 로토루아에서 안식년을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보, 뉴질랜드의 어떤 선교사님이 우리의 안식년을 위하여 도움을 주신대요. 우리 뉴질랜드로 가서 안식년을 보냅시다. 거기 풍경이 너무 아름답대요. 그곳에 가면 힐링도 되고 충분한 쉼도 될 거예요.”
아내도 흔쾌히 동의했다. 우리 부부는 뉴질랜드의 작은도시 로토루아에 답사를 겸해 두 번 방문했다. 로토루아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더구나 1년 내내 온천을 즐길 수 있는 유황온천 도시였다.
기쁜 마음으로 결정하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모든 서류를 준비해 신체검사도 받았다. 대사관 인터뷰도 한 번에 통과해서 1년짜리 뉴질랜드 비자를 받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뉴질랜드로 떠나기 한 달 정도 남은 때였다.
당시 서울 관악구 신림동 예광감리교회 새벽기도회에 매일 참석하고 있었다. 어느 날 새벽예배를 마치고 개인 기도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영적 감동이 있었다. 어떤 신비적인 음성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마음 속에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상훈아, 가장 더운 아프리카 지역에서 7년 동안 고생 많았다.” “주님,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상훈아, 너는 나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순종할 수 있지?” “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제 가장 추운 지역인 알래스카로 가서 또 다른 7년 동안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야겠다.”
그 음성을 듣고 정말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잘못 들을 수도 있지. 내 생각일지도 몰라.’ 그러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매일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주님은 내 마음에 계속해서 같은 마음을 주셨다. 이제 뉴질랜드로 향하기 3주 전이었다. 결정을 번복하기 싫었다.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뉴질랜드로 떠나기 2주 전에 도저히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내가 기도할 때 같은 마음을 주신 것이다. “여보, 하나님께서 자꾸 알래스카로 가라는 마음을 주시는데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주님이 알래스카로 가라는 말씀일까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정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 뉴질랜드에서의 안식년의 꿈을 포기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다. 길게도 아니고 1년 만 사는 것인데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가 기도하면 할수록 마음을 하나로 합쳐주셨다. 결국 함께 금요예배를 같이 드리면서 주님께 눈물로 순종하기로 했다. 그때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와 평안을 부어주셨다.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받는 길은 내가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알래스카로 가기로 하고 뉴질랜드의 안식년을 포기했다. 훗날 이야기이지만 그때의 결정으로 인해 알래스카 땅에 최초의 한국 감리교회와 에스키모선교센터가 세워졌다. 그렇게 아내와 나는 7년 사역을 서원하고 약속의 땅 알래스카로 2003년 떠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