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양은 이제야 겨우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한다. 아직 공원을 산책하는 것까진 어렵다. 그래도 엄마는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아이는 얼마 전만 해도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려 하지 않았다. 사실 아이는 자책하고 있었다. “다 괜찮다”고 말하는 엄마를 보면서 더 죄책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소녀는 이 모든 걸 자신의 불찰로 여기며 자신을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벌을 내리는 중인 것 같았다.
A양을 포함해 확인된 문형욱(갓갓·n번방 창시자)의 피해자는 모두 21명이다. 피해 횟수만 1275회다. 지난달 24일 문형욱에 대한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그의 변호사는 “피해자들과 합의를 보고 있으니 선고 기일을 조금 더 늦춰 달라”는 요청을 했다. 문형욱이 1심에서 34년형을 받고 항소할 때 같은 이유를 내세우고도 여전히 합의를 시도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가 검거된 지 1년이 지났으니 그 시간 동안 피해자들은 “제발 합의를 해 달라”는 애원을 들어왔을 것이다. 피해자는 참혹했던 과거를 말하는데, 가해자는 창창할 미래를 말한다. 이런 게 비극이 아닐까 생각했다.
피해자 변호인은 재판에서 이런 말을 했다. “피해자들은 시간이 흘러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유포된 영상이 너무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삭제를 포기하고 살아갑니다. 부모는 억장이 무너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피고인은 너무 쉽게 ‘새로운 시작’을 말합니다.”
문형욱에 대해 어떤 말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3월 국민일보가 ‘n번방 추적기’를 연재할 당시 기사 제목에 조주빈(박사)이 만든 ‘박사방’이 아닌 ‘n번방’을 앞세운 이유는 이번 신종 성착취 범죄는 문형욱의 손에서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목적 자체가 달랐다. 박사방이 돈을 벌기 위해 조직적인 성착취를 저지르며 여성을 상품화했다면, n번방은 여성을 학대하고 그 자체에서 희열감, 우월감을 느끼고자 만든 공간이었다.
그래서 내 분노의 대부분은 문형욱을 향해 있었다. 조주빈을 ‘문형욱 모방범’ 정도로 취급하기도 했다. 취재 과정에서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을 때도 주인공은 늘 문형욱이었다. 교화를 믿지만 적어도 문형욱은 아니라고 그때 생각했다.
조주빈은 포토라인에 서서 고개를 치켜들고 “악마의 삶을 멈춰주셔서 감사하다” 같은 말을 늘어놨다. 그가 이 말을 할 때 입고 있었던 의류 브랜드는 실시간 검색어에 등장할 정도였는데, 이미지 훼손을 이유로 해당 상품을 단종시켰다는 말도 나온다. 당시 조주빈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사였다. 그가 교도소 안에서 소란을 부렸다거나, 학창 시절 봉사 동아리 활동을 했다거나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지라시 형태로 돌기도 했다. 그때도 지금도 n번방은 조주빈의 ‘작품’으로 읽히는 것 같다.
문형욱은 그로부터 두 달 후 잡혔다. 그때도 이슈는 여전히 타고 있었지만 조주빈만큼의 공분은 일지 않았던 것 같다. 포토라인에 선 문형욱은 겁을 먹은 듯 보였다. 조사 내내 소극적이고 말을 버벅거리며 눈치를 봤다고 했다. 교활하게 조사에 임하던 조주빈과는 달랐다. 그래서 조주빈은 악마, 문형욱은 ‘한심한 찌질이’쯤으로 여겨진 게 아닌가 싶었다.
문형욱이 n번방을 공범들에게 물려주며 별것 아닌 듯 심드렁하게 범행에 대한 말을 뱉던 그날을 기억한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는 질문에 “일탈”이라고 짤막하게 답했다. ‘유포하지 않은 성착취 영상이 있냐’는 말에는 “(피해자들이) 말을 잘 들으면 뿌리지 않겠다”고도 했다. 소심한 어린 청년이 잠시 저지른 일탈로 치부하기엔 악랄한 말들이었다. 미성숙한 성적 가치관에서 비롯된 범죄가 아니었다. 학대로부터 얻는 쾌감을 즐기고 있었다.
피해자를 상담했던 전문가들은 아이들의 공황 상태가 수그러들기 시작한 시점은 가해자가 검거된 순간부터라고 했다. 그리고 죗값을 치르는 과정을 보며 호전된다고 한다. 난 아이들이 언젠가는 “친구 집에서 자고 들어가겠다”며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고, 원피스를 몰래 입었다는 이유로 언니와 온종일 옥신각신하는 일상을 되찾길 바란다. 아이들은 ‘아직 멈춤’ 상태인데, 그가 ‘새로운 시작’을 말하긴 이르다. 감히 미래를 살아야겠다며 합의를 종용하는 일도 멈춰야 한다. 또 다른 문형욱이 없어야 또 다른 조주빈도 없다. 검찰은 항소심에서도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선고 기일은 오는 22일이다. 단죄를 기대한다.
박민지 사회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