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품을 읽거나 영화를 보다 보면 문득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온다. 나태주 시인의 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풀꽃 1)를 읽으면서 우리는 가깝고 자세히, 오래 봐야 보이는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된다. 영화 ‘암살’의 주인공 안옥윤(전지현)이 ‘친일파 한 명 죽인다고 독립이 되느냐’고 묻는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에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라고 답하는 장면을 보며 항일운동에 온몸을 바친 독립투사를 잊어선 안 된다는 걸 깨닫는다.
문학작품과 영화로 자신의 삶과 세계뿐 아니라 신앙도 성찰할 수 있을까. 기독교 언어로 인문학을 해설하는 한재욱 강남비전교회 목사와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소속 영화평론가인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는 그 가능성을 발견한 이들이다. 두 사람이 최근 펴낸 ‘인문학을 하나님께 3’(규장)과 ‘시네마 에피파니’(새물결플러스)에서는 국내외 문학작품과 영화가 품은 신앙적 깨달음을 살펴볼 수 있다.
한 목사의 ‘인문학을 하나님께 3’는 시와 소설 속에 깃든 기독교적 성찰을 발굴한 책이다. 전작 ‘인문학을 하나님께 1, 2’가 각각 인문학 개관과 인문학의 뼈대인 철학과 역사를 다뤘다면, 이번 책에서는 39편의 시와 소설이 어떻게 독자에게 공감과 위로, 신앙적 격려를 건네는지를 해설한다.
한 목사는 “나는 그늘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란 선언으로 시작하는 정호승의 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서의 그늘을 “삶에 피할 수 없는 본질”로 본다. 또 그늘이란 단어에서 달동네 마구간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를 떠올린다. “예수는 그늘을 겪은 분이기에 그늘 있는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한다.… 그리고 그 그늘을 선용해 그늘진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신다. 그러니 그늘을 너무 무서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말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엘리 위젤의 소설 ‘나이트’에선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발견한다. 1944년 15세의 나이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된 위젤은 탈출 기도 실패로 붙잡힌 한 소년의 처형장면을 본다. 교수대에서 몸부림치는 소년의 처참한 모습에 수감자들은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단 말인가”라며 웅성댄다. 그때 위젤은 자신의 마음에 울리는 작은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은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다.” 한 목사는 고통의 해결이 아닌 고통에 동참하는 절대자의 방식에서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의 하나님을 발견한다. 자녀가 아프면 자신은 더 아파하는 부모처럼 우리의 고통에 함께하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얻는다는 것이다.
한 목사의 책이 문학의 정제된 언어 속 신앙의 의미를 캐낸다면 김 교수의 ‘시네마 에피파니’는 어두운 현실을 담담히 그려낸 영상에서 건져낸 묵직한 깨달음을 전달한다. ‘에피파니’는 예수가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을 축하하는 축일이란 뜻의 영단어다. 기독교계에서는 ‘주현절’로 불린다. 김 교수가 조어(造語)한 ‘시네마 에피파니’란 영화를 보고 신을 만난 듯한 큰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뜻한다. 그가 에피파니를 발견한 36편의 작품에는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영화 ‘미나리’와 ‘기생충’도 있다. 미나리를 다루면서는 작품보다 배우 윤여정의 캐릭터 분석에 집중한다. “그녀의 대차거나 서글픈 연기는 보는 이의 저리고 먹먹한 인생을 퍼올리고 곰삭여 회감(回感)하게 한다.… 위대한 배우와 한 세대를 살아온 모든 관객은 (그의 아카데미 수상을) 기뻐할 자격이 있다.”
공간과 햇살, 비와 냄새로 계급 역전이 거의 불가능한 우리 사회를 그림처럼 묘사한 ‘기생충’에서는 부조리한 현실의 에피파니를 발견한다. “빈부격차가 만연하고, 겉으로는 친절해도 속으로 굴욕감이 쌓이면 어느 순간 폭발할 수 있다고 영화는 경고한다.… 극적 분열이 있는 곳에는 끝내 비극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평범한 일상에서 영원에 관한 통찰을 얻길 원하는 이들에게 권할만한 책이다. “영화는 에피파니의 순간을 통해 유한한 인간이 무한해 형용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깨닫게 하는 귀중한 예술이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