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도와주세요, 도와드릴까요

입력 2021-07-08 04:08

“저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낯선 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기억이 아득하다. 대학 시절 지방에 갔다가 밤늦게 서울 영등포역에 도착했는데 버스비를 낼 동전조차 없는 걸 알게 됐다. 한참을 망설이다 40, 50대 아주머니께 “버스비가 없는데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말을 꺼냈고 아주머니는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1000원짜리 지폐를 건네주셨다. 왜 그리 낯이 뜨겁던지, 주변의 모든 사람이 다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그 외엔 딱히 낯선 이에게 도움을 요청한 기억이 없다. 다행스럽게도 사고를 겪거나 갑자기 몸 상태가 나빠진 경우는 없었지만 어떻게 살면서 남의 도움 받을 일이 없었겠는가. 무거운 짐을 들고 갈 때 앞서 가던, 혹은 마주 오던 이가 문을 잡아준 일도 적지 않았고, 낯선 상황에서 어찌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할 때 도와준 분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때도 먼저 “도와주세요”라고 얘기해본 경우는 없었다. 남에게 불편을 끼치는 게 아닌가, 혹은 스스로가 무능하거나 뻔뻔하게 보이는 건 아닐까 하는 망설임도 있었다.

최근 인터넷에선 서울지하철 3호선 한 역에서 쓰러진 여성을 부축하려는 남성이 아무도 없었다는 목격담이 화제가 됐다. ‘괜히 나서서 돕다 성추행범으로 몰릴 수 있다’며 지난달 지역 언론에 보도됐던 대전지방법원의 판결을 거론하는 이들도 있었다. 화장실에서 구토를 하고 나오던 여성이 주저앉자 일으켜 세워준 남성이 강제추행으로 기소됐다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주저앉은 여성을 일으켜 세웠다가 재판에까지 넘겨진 만큼 지하철역에서 쓰러진 여성을 부축하다 비슷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선의의 행동이 자칫 오해를 낳고 많은 비용과 비난을 감수해야 할 수 있다는 우려는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성이 모르는 여성을 도와주면 피해 본다’는 식의 논리는 심한 과장이다.

이런 갈등의 원인은 우리 사회가 타인을 도와주는 방법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는 듯하다. 갑자기 쓰러진 사람을 봤을 때 어떤 상황인지, 어떻게 도와줄지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일으켜 세우는 건 상대에게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자칫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는 행동이다. 장애인 본인의 의사를 묻지 않은 채 무작정 도와준다고 나서는 게 문제로 지적된 적도 있었다. 의료인이 아니라면 의식을 확인한 뒤 어떻게 도와줄지를 묻는 것이 먼저고, 의식이 없다면 119 신고를 해서 지시를 받는 게 최선이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방문연구원으로 지낼 때 인상적이었던 일 가운데 하나는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타인을 돕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 양손에 무언가 들고 있거나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면 여지 없이 “May I help you(도와줄까요)?”란 얘기가 들려왔고, 초면인데도 “Would you help me(좀 도와주실래요)?”라며 말을 걸어오는 이들이 적잖았다. 영어가 짧아 거절보다는 승낙을 하기 쉽다 보니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도움을 받거나 주는 일이 익숙해졌다. 그러다 어느새 “May I help you?”나 “Would you help me?”라고 낯선 이에게 말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놀라기도 했다.

타인을 도와주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곤경에 처한 이를 도와주라고만 할 게 아니라 어떤 순서로 무엇을 묻고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를 학교에서든 예비군훈련에서든 알려줬으면 한다.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훈련도 필요하다. 도움을 받아본 이가 도움이 필요할 때를 알고, 제대로 도와줄 수 있다. 자신의 어려움을 내보이기 꺼리는 우리 사회에선 어쩌면 타인에게 적절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훈련이 가장 시급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승훈 사회부장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