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을 대표하는 제조기업이 잠재적 디지털세 과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디지털세 합의안이 나오면서 재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구글 잡으려고 시작된 디지털세의 유탄을 삼성과 하이닉스가 맞게 생겼다”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수조원의 이익을 국내에서 거두면서도 국내에 세금은 제대로 내지 않은 글로벌 디지털 기업들에 대해 정당 과세의 단초가 마련된 것을 평가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국 기업이 해외 정부에 내야 할 세금과 해외 기업이 한국 정부에 내야 할 세금을 따져볼 때 디지털세 도입이 한국에 득(得)이 될지 실(失)이 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부는 이에 대한 즉답을 피한다. 정부 주변에서는 “디지털세에 대한 진짜 논의는 이제 시작”이라는 얘기가 많다. 최근 도출된 OECD 합의안은 디지털세의 큰 방향과 골격만 담았을 뿐 실제 각국 간 세부 쟁점이 여전히 남았으며, 실제 시행까지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코로나로 주춤, 바이든 당선으로 전기
디지털세에 대한 논의는 법인세의 허점에서 출발한다. 이른바 ‘가파’(GAFA·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로 불리는 미국의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여러 국가에 진출해 디지털 서비스로 막대한 매출을 얻고도 물리적인 사업장이 그 나라에 없다는 이유로 해당 국가에 세금을 내지 않는 문제를 개선하자는 데서 논의가 출발됐다. 2019년 프랑스가 먼저 세율 3%의 디지털세 부과를 공식 발표하면서 논의는 본격적으로 불붙었다.
유럽을 중심으로 디지털세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하면서 지난해 초 OECD와 주요 20개국(G20)이 참여하는 ‘포괄적 이행체계(IF)’라는 회의체가 디지털세의 기본 골격 안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이때 마련된 디지털세 논의는 디지털 기업의 매출에 대해 매출 발생국에 과세권을 배분하기 위한 논의(필라1)와 기업들의 조세 회피를 방지하기 위한 글로벌 최저한세 도입 논의(필라2) 등 크게 두 가지였다.
그러나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쳐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자국 기업의 손해 등을 이유로 필라1을 사실상 저지했다. 마침 지난해 초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면서 다자간 논의 역시 사실상 ‘일시 정지’ 상태였다. 그러나 올 초 조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전기가 마련됐다. 확장재정을 공언해온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가 감축한 법인세를 다시 인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 내에서 기업의 해외 이전이 가속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바이든 행정부는 필라2 논의에 다시 적극적으로 나섰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전향적으로 협상에 임하면서 디지털세 협상은 다시 속도를 냈고, 지난 1일 IF 참여 130개국 합의안이 공개됐다.
세율 등 디테일은 여전히 ‘깜깜이’
그러나 내용을 뜯어보면 한국으로서 마냥 좋아할 수 없다. 당초 디지털 서비스 기업에만 부과하자던 논의는 희석되고, 디지털화와 국제화의 영향이 일반 소비재 기업까지도 미친다는 미국 측 주장이 먹히면서 제조업 전반으로 과세 대상이 확대됐기 때문이다. 제조업 비중이 국내총생산(GDP)의 27.8%에 달하는 한국에는 악재다.
정부는 OECD 논의 과정에서 중간재를 만드는 제조기업은 과세권 배분에서 제외하자는 주장을 펼쳤지만, 냉혹한 국제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OECD 합의안에는 채굴업(자원채취)과 금융업만 예외가 인정됐다.
재계 일각에서는 디지털세 도입으로 기업의 부담이 커질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에 대해 정부는 “국제 조세체계가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국내 기업이 해외에 내는 세금만큼 국내에서 공제를 받는 등 이중과세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가 있으므로 기업 세 부담은 중립적”이라고 진화 중이다.
세간의 관심 사안인 한국의 유불리 여부에 대해 정부는 “현재로서는 추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아직 OECD의 디지털세 최종 합의안이 마련되지도 않았고, 설령 합의안이 나오더라도 실제 디지털세 과세를 시행하려면 관련 법령에 구체적인 세율 등을 담아야 한다. 현재 나온 OECD 합의안에는 과세권 배분을 통상이익률(10%)을 넘는 초과이익의 20~30%에 대해 과세권을 배분한다고만 돼 있다. 한국은 물론 다른 나라들이 실제 디지털세 관련 법령에 세율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유불리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OECD는 오는 10월 G20 정상회의에서 최종 합의를 한 뒤 내년에 각국이 다자협정과 근거법령 법제화에 나서 2023년부터 시행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OECD 구상대로 합의가 원만히 이뤄질지도 미지수고, 실제 각국이 입법에 들어가더라도 각국 의회가 자국 유불리 여부 등을 따지다 보면 디지털세 도입이 지연될 수밖에 없다.
정부 관계자는 9일 “달리기에 비유하면 지금은 거리와 규칙만 정해진 상태에서 출발선 앞으로 다가가는 단계일 뿐”이라며 “총성(OECD 최종 합의안)이 울리면 자국 기업과 정부의 손익 타산을 두고 치열한 시합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