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샌드백’ 신세

입력 2021-07-06 04:07 수정 2021-07-06 10:03
해상운송 업계 노사와 학계, 부산 시민단체는 5일 부산 중구 마린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국내 해운사들에 대한 공정거래위원회의 과징금 부과 방침을 철회하라고 촉구하며 공정위 모형을 부수는 퍼포먼스를 했다. 연합뉴스

공정거래위원회가 부처 사이에서 ‘샌드백’ 신세로 전락했다. 온라인플랫폼법(온플법) 제정 과정에서 1년 넘게 방송통신위원회와 갈등을 겪더니 최근에는 해운 업계와 양계 업계 담합 제재를 앞두고 관련 부처들이 공정위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정권말이 되면서 부처 간 이견을 조율해야 할 청와대가 기능을 상실하면서 상대적으로 정부 내 입김이 약한 공정위가 코너로 몰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조성욱 공정위원장이 디지털 공정경제를 강조하며 추진하고 있는 온플법은 지난 1월 정부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지만 여전히 법 제정은 되지 않고 있다. 국회 논의과정에서 공정위, 방통위, 중소기업벤처부 등의 ‘밥그릇 싸움’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공정위는 최근 HMM·SM상선·흥아상선·장금상선 등 국내 12개 컨테이너 선사가 한국과 동남아시아를 오가는 항로의 운임을 담합한 사건에 대한 과징금 부과 절차에 들어갔다. 이에 해양수산부는 해운법 상 선사들이 운임이나 화물 적재 등 운송 조건에 대한 ‘공동행위(담합)’를 허용하고 있다는 논리로 공정위를 압박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 역시 하림 등 닭고기 가공업체들이 일정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물량을 담합한 사건에 대해 “양계 농가 보호를 위한 관행”이라며 업계 편을 들고 있다.

부처 간 갈등이 이는 데 대해 공정위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온플법은 정부안에 분명히 주무부처가 공정위로 명시돼 있다. 이후 국회 논의과정에서 방통위와 중기벤처부가 ‘숟가락’을 얹은 셈이다. 하지만 정부안은 이미 희석된 상태로 부처 간 힘겨루기만 남은 상황이다. 청와대마저 최근 부처 간 이견이 있는 입법활동은 중단하라는 지시를 각 부처에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5일 “청와대가 적극적으로 중재와 조율을 하는 게 아니라 부처들한테 아예 시끄러운 일을 만들지 말라고 한 셈”이라며 “공정위에겐 불리한 시그널”이라고 말했다.

해운과 양계 담합은 공정위가 야심차게 준비한 대형 사건으로 관련 매출액만 수십조원에 달한다. 공정위는 경쟁당국으로서 불공정행위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무리한 제재라는 부처들의 공격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공정위는 해운법 상 해수부가 공동행위 신고를 받는 등 권한이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수십년 간 단 1건의 신고를 받지 않는 등 정상적인 감시활동을 하지 않아놓고 이제와서 제재 권한을 해수부가 가져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입장이다. 양계 담합 역시 업체들 간 담합한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 농식품부가 관행이었다며 업계 편만 들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하지만 국회나 여론은 공정위에 우호적이지 않다. 공정위 관계자는 “어려운 때일수록 수장이 중요한 법인데 조 위원장이 부처나 국회를 설득하고 협조를 구하는 데 서투른 것 같다”고 전했다.

세종=이성규 신재희 기자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