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청소년 시절 다니던 교회는 서울 강북의 문화촌이라는 곳에 있었다. 교회 앞 좁은 도로를 따라 작은 개천을 건너고 시장통을 지나면 산동네 무허가 판자촌이 나온다. 수천을 헤아리는 빈민이 허술한 합판 집에 다닥다닥 붙어살았다. 퇴근 시간이 되면 막노동해서 하루 벌어 사는 사람, 연탄 한 장 새끼줄에 끼우고 봉지 쌀 사서 올라가는 사람들이 교회 앞 좁은 길을 메웠다.
그 교회에 지하 예배실이 있었다. 한 20~30평 남짓 되는 습기가 항상 차 있는 축축한 곳이었다. 오후 8시가 넘으면 사람들이 그리로 모여든다. 퇴근길 젊은이들이 교회에 들르는 것이다. 온종일 일하고 만원 버스에 시달리고 저녁밥도 못 먹었다. 장의자가 있었지만 의자에 앉는 사람은 없다. 저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벽을 마주 보고 앉았다. 손을 들고 한 시간씩 기도하고서야 기도실을 떠났다. 눈물을 흘리면서 부르짖어 간구하는 젊은이가 적지 않았다.
이 젊은이들은 무엇을 위해 기도했을까.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이니 기복적인 기도를 드렸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지 말자. 오늘날 성도는 세련되고 성숙한 교인이니 손들고 울부짖는 기도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오만한 생각도 버리자. 이들 기도의 중심은 영적 갈망이었고, 가난과 고통은 그 영적 갈망을 촉발하고 선명하게 하는 조건이었을 뿐이다.
오늘 우리 조국교회가 무기력한 교회가 된 이유로 수십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그 모든 이유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성도가 영적 갈망을 잃어버린 것이다. 영적 갈망을 채우기 위해 교회에 오는 성도가 많지 않다. 오래된 습관이나 가족의 전통, 소속감과 사회적 교류 및 눈도장, 결혼 대상자 찾기와 봉사 활동의 재미 때문이거나 직분에 대한 책임감과 벌 받을 것 같은 두려움 등이 교회를 찾는 이유다.
성도가 영적 갈망을 느끼고 이를 채울 수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 우리 시대 교회의 가장 긴요한 과제다. 소그룹 활동, 교양강좌, 경로대학, 바자회, 비전트립, 사회봉사, 교회 건축 등으로는 안 된다. 교회가 진리의 물 근원을 찾아 길을 헤매는 나그네의 공동체가 돼야 한다.
우리의 예배가 과연 성도의 영적 기갈을 느끼게 하고 채워주는 시간이 되고 있는가. 밋밋한 중립적 언어로 채워진 설교는 영적 배고픔을 느끼게 하지 못한다. 설교 후 손을 반쯤 들고 거룩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반복적으로 찬양하는 것으로는 영적 갈증을 채울 수 없다.
실례가 되는 말인지 몰라도 목회자 자신이 영적 갈망을 별반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이들의 주된 관심은 교회 성장 프로젝트나 출석 성도들의 숫자와 헌금 액수, 영향력 있는 장로나 권사와의 식사, 기독교 방송 출연과 유튜브 조회 수, 노회·총회 임원과 해외 선교지 방문, 유학 중인 자녀 걱정, 은퇴 후의 대책 등이다.
포스트코로나 시대, 변화된 환경에서 어떻게 목회해야 하느냐고 묻는 목회자가 적잖다. 교회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일은 언제나 영적 회복에서 시작된다. 엉뚱한 곳을 기웃거리지 말고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자. 목회자가 먼저 자신에 대해 절망하는 것이다. 골방에, 교회 마룻바닥에, 산속 기도원에 홀로 앉아 슬퍼하고 분노하며 회의하고 항의하자. 신학자는 이미 정립된 교리를 재탕하고 증명하며 논쟁하고 비판하는 ‘영광의 신학’에 안주하지 말자.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악에 도전하다가 번민과 유혹에 휩싸이는 ‘십자가 신학’에 도전하자.
곧 휴가철이다. 휴양지로, 해외로 여행 계획을 세우기 전에 먼저 하루 이틀을 떼어 영혼의 골방을 찾는 것은 어떨까.
장동민(백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