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휴일] 눈이 쌓인다 다음 문장으로 가자

입력 2021-07-01 20:14 수정 2021-07-01 20:44

눈발이 날린다 각은 45도,
자크 프레베르의 ‘절망이 벤치에 앉아 있다’를 읽는다
시집의 첫 페이지 첫 행을 읽을 때
내 영혼은 새 떠난 나뭇가지처럼 떨린다.
어느 곳에 눈을 주면
그곳에서 바람이 일어나는 것처럼,
눈을 뜨는 축복이다
앞 강 얼음 금 가는 소리가 들린다
쩌렁쩌렁 산이 운다 산은 금 가는 것이 싫은 것이다
눈 맞는 나무, 눈을 가져오는 바람, 사이를 열어주는 풀잎,
나는 강에서 오는 바람을 좋아한다
시집 속에서 손을 집어넣어 바람을 만진다
부드럽고도 따스하구나 언 내 손끝이 녹고,
창가에 앉아 딸도 시를 읽는다
딸도 시를 읽을 때
나처럼 참을 수 없는 영혼의 빛들이
산에 부딪쳐 튈 것이다
내 딸도 시의 첫눈으로
본 사물이 금 가고 부서지는
섬광 같은 빛을 보았을 텐데,
그것이 시인의 첫길이었는데
겁 없이 강물로 달려드는
눈보라 속에 서 있는 나무들아
첫 문장에 오래 머물러 내 등에 눈이 쌓이는구나
평행을 이루려는 눈발의 각도를 잡아다닌다
눈이 쌓인다 다음 문장으로 가자

김용택 시집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중

시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에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이토록 깊게 그렸다. “눈이 쌓인다 다음 문장으로 가자”는 마지막 행은 앞으로 거듭 거듭 불려나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