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단 ‘트레이드 갑질’ 이젠 끝… 4개 스포츠 표준계약서 적용

입력 2021-06-30 00:03
"내 얘기는 아무도 몰랐으면 해. 창피하고 못났고 한심하니까.…" 지난해 7월 프로배구 선수 고유민이 25세로 세상을 떠나며 남긴 유서는 자책으로 끝나 있었다. 소속팀 현대건설이 자신과 계약을 해지한 뒤 임의탈퇴 신분으로 묶어 버리는 동안 별 대응도 못 하고 사실상 선수 생활이 끝나버린 데 대한 토로였다. 유족이 구단주를 고소·고발했으나 검찰은 최근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했다.

고유민의 죽음은 국내 프로구단과 선수의 관계에 작지 않은 울림을 남겼다. 구단이 '갑'으로서 사실상 선수 경력을 좌우할 수 있는 관행에 문제가 제기됐으나 고유민 정도의 충격을 준 이는 드물었다. 약 11개월 뒤인 지난 3일 문화체육관광부는 프로스포츠 종목별 표준계약서를 고시했다. 고유민 사태 당사자인 배구계를 시작으로 개막 준비 중인 농구, 시즌이 진행 중인 야구와 축구도 이를 적용할 전망이다.

팬들에겐 체감이 적을지언정 표준계약서 도입은 구단과 선수 입장에서는 판이 흔들릴 만한 사건이다. 해외로 눈을 돌려도 정부가 선수 보호를 위해 직접 기준선을 제시한 예는 드물다. 달리 말해 종목마다 정도 차는 있을지언정 국내 관행이 선진 리그에 비해 비합리적이었다는 이야기다. 국민일보는 지난 24일 표준계약서 도입을 추진한 문체부 실무자, 법무법인 변호사들을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사에서 만났다.

새로운 프로스포츠 표준계약서 담당부서인 문화체육관광부 스포츠산업과 조상준(왼쪽) 과장과 표준계약서 연구용역을 맡은 법무법인 세종 임상혁 변호사가 지난 26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사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윤성호 기자

무엇을 얼마나 바꿀까

표준계약서 도입은 문체부가 문재인정부 들어 예술 분야부터 박차를 가한 일이다. 예술계에서도 제대로 된 계약서 없이 창작자들이 고통받는 경우가 잦았다. 이들은 프로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일반적 피고용 관계가 아니기에 근로기준법 적용대상이 아니다. 문체부는 앞서 12개 분야에 표준계약서 69개를 도입했다. 공정을 내세운 국정 기조에 맞추려는 시도다.


프로스포츠 분야 실무부서인 문체부 스포츠산업과 조상준 과장은 “고유민 사태 등 연맹과 구단, 선수 간 계약 관계에서 문제 사례가 누적됐다. 표준계약서는 해결 방법 중 하나로 제시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은 사무관은 “종목마다 입장이 다르기에 정부에는 굉장히 (개입이) 부담스러운 얘기”라면서 “그렇지만 문제가 반복되니 정부가 바람직한 계약이 뭔지를 제시할 필요가 있는 시점이라고 봤다”고 설명했다.

과정은 지난했다. 문체부가 지난해 8월부터 야구, 축구, 남녀 농구, 배구(배구는 한 단체가 남녀 총괄)까지 5개 분야 선수·구단·연맹과 연 간담회·공개토론회만 16차례에 달한다. 연구용역을 진행한 법무법인 세종은 해당 건에 변호사 8명이 달라붙었다. 김 사무관은 “기존 연맹별 표준계약서를 검토하니 규약·규정에 연동된 게 너무 많았다”고 했다. 세종 임상혁 변호사는 “변호사들조차 종목별 규약집을 찾아봐야 이해할 정도였으니 선수들에게는 이해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했다.



‘트레이드 파동’ 이제는 없다?


한국 프로스포츠에서 ‘트레이드 파동’은 종목을 막론하고 벌어졌다. 구단이 선수 동의 없이 다른 팀과 선수를 맞바꿀 수 있게 한 게 주된 원인이다. 프로야구 선수협회가 창설된 계기도 트레이드 건이었다. 양준혁은 1999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됐다. 양준혁이 트레이드를 거부하자 해태는 그를 임의탈퇴 공시한다고 경고했고 양준혁은 결국 트레이드를 받아들였다.


프로축구에서는 근래 큰 파문이 일었던 남준재의 예를 들 수 있다. 인천 유나이티드의 프랜차이즈급 스타 공격수였던 그는 2019년 7월 인천 구단에 의해 제주 유나이티드로 트레이드됐다. 구단이 자신에게 일언반구 없이 트레이드를 진행했다고 남준재가 항의하자 팬들은 구단이 선수를 푸대접했다며 들고 일어났다. 구단은 에이전트를 거쳐 선수 입장을 사전 확인했다고 해명했다. 진실공방에도 불구하고 트레이드는 진행됐다.

표준계약서에서 종목을 막론하고 가장 민감한 부분도 트레이드다. 구단이 트레이드를 시도할 시 선수와 ‘협의’를 거쳐야 한다는 것, 선수 요청시 사흘 이상 준비기간을 부여한다는 게 새 표준계약서 트레이드 항목의 핵심이다. 트레이드 계약 체결 시 선수에게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해야 할 의무도 생겼다. 야구는 ‘협의’라는 표현을 2001년 공정위 시정조치를 거쳐 사용해왔다.

다만 ‘선수와 협의’라는 표현은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표준계약서에 ‘합의’라는 표현을 썼다면 선수 동의가 확실히 전제됐겠지만 구단들 반발이 심했다. 임 변호사는 “트레이드 시장 자체가 동의를 전제 않고 만들어졌기에 당장 도입하면 시장 자체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게 구단 쪽 주장”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표준계약서를 토대로 하면 협상력이 큰 선수는 이를 ‘합의’로 바꿔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임 변호사는 “선수들 입장에서 큰 진전이 있는 건 사실”이라며 “만나본 선수들의 입장은 ‘최소한 알려주기만이라도 해달라’는 것에 가까웠다”고 부연했다. 김 사무관은 “표준계약서가 의도한 건 구단이 선수를 물건처럼 비인간적으로 바꾸는 일만은 막는 것”이라고 했다. 트레이드가 선수 의사에 반해 진행되더라도 선수가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을 요청에 따라 최소 3일은 주게 했다.

‘임의탈퇴’라는 칼

트레이드 못지않게 주목할 건 임의탈퇴 제도의 변화다. 본래 선수와 구단이 합의해 선수 신분을 내려놓는 취지지만 실제로는 구단이 말 안 듣는 선수를 출전도, 이적도 못 하게 묶어두는 징계 조치로 남용됐다. 표준계약서는 기존의 ‘임의탈퇴’ 대신 ‘임의해지’라는 용어를 쓰게 하고 선수의 서면 동의가 없었다는 게 확인되면 즉각 효력이 사라지게 했다. 효력은 사실상 무기한이던 것을 3년으로 제한했다. 그간 징계 수단으로 쓰이던 해당 제도를 원래 목적대로 ‘선수와 구단 간의 은퇴 약속’에 맞게 운영한다는 이야기다.


가장 큰 충격을 줄 분야는 배구다. 배구 스타 김연경이 2013년 흥국생명과 갈등을 겪으며 임의탈퇴를 ‘당했던’ 일이 일례다. 각 연맹에 따르면 최근 3년간 프로배구 임의탈퇴 공시 사례는 최소 서른 번이 넘는다. 여자농구도 10여 차례로 6개 구단인 리그 규모를 고려하면 많다. 다만 역시 10여 차례 임의탈퇴를 공시했던 프로야구계는 표준계약서의 효력 기간 제한 3년이 기존 ‘보류권’ 제도 근간을 흔들 수 있다고 강하게 주장해 이를 홀로 제외했다.

각 종목은 서류상으로 임의탈퇴 시행 시 선수의 동의를 받아왔다. 그러나 그간 징계수단으로 쓰여온 걸 감안하면 말뿐인 제도에 가까웠다. 표준계약서에 선수 동의가 필수 사항으로 명시된 만큼 선수들은 앞으로 구단과 연맹이 자신의 동의 없이 임의해지 했음을 증명하면 즉각 이를 무력화할 수 있다. 프로축구는 아예 이번에 관련 제도 폐지를 추진한다.

초상권 문제도 핵심이다. 앞서 게임 초상권 사용 문제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야구가 특히 그렇다. 표준계약서는 1차적으로 초상권이 선수 소유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선수 활동 관련해서만 이를 구단에 넘기는 것으로 규정했다. ‘선수 활동’의 범위도 경기와 훈련, 팬서비스 등으로 명확히 정했다.

선수는 구단과 사전 협의만 한다면 선수 활동과 관련 없는 공식행사에 동의 없이도 자유롭게 출연할 수 있다. 이를 금지할 수 있는 사유는 구단·연맹 이미지 실추, 혹은 선수 활동에 명백하게 지장을 주는 것으로 제한한다. GS 스포츠단 소속 선수가 삼성전자 홍보 행사에 출연한다든지, 훈련 기간에 즈음해 10박 이상 장기간 원거리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든지 하는 경우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모두를 위한 계약서

표준계약서가 주 대상으로 삼는 건 목소리 큰 스타 선수들뿐만이 아닌, 엔트리를 구성하는 평범한 선수들이다. 임 변호사는 “고교·대학을 막 나온 신인들은 협상력이 거의 없다. 일반 사회라면 노조가 도와줘야겠지만 비슷한 성격인 선수협회조차 야구·축구 외엔 없기에 표준계약서가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다만 조 과장은 “기본적으로 선수들 스스로도 인식을 바꾸고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문체부는 다음 달 중 해설서를 내놓을 예정이다. 표준계약서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관한 내용이다. 임 변호사는 “표준계약서 자체에도 선수와 구단의 의무를 가독성이 높게 먼저 제시해놓았다”면서 “선수 인권 보장의 기능도 있지만 선수와 구단이 계약에 앞서 서로의 의무를 숙지하는, 교육적 기능도 있다”고 했다. 문체부는 올해 안에 각 연맹이 규약 등에 표준계약서를 반영했는지 점검해 지원금 등에 반영한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