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근 목사의 묵상 일침] 베드로의 항변

입력 2021-06-30 03:05

황제와 분봉왕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도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역시나 빠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베드로가 대답했다. “당신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교회의 기초가 될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그가 대견하셨는지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한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러면서 그러한 깨달음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도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것이 깨달음의 끝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이때로부터’ 자신이 앞으로 감당하셔야 할 궁극적 사명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시작하셨다. 깨달음의 새로운 단계로 제자들을 이끌고자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셔야만 한다는 것을 나타내셨다.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를 짊어지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이 마침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제자들이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고난받고 죽임당하는 메시아는 그들의 생각과 거리가 멀었다. 이에 베드로는 격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베드로가 ‘항변했다’고 번역된 단어는 예수님께서 풍랑과 귀신을 ‘꾸짖으셨다’는 의미로 사용된 단어와 동일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면서 거칠게 저항한다. “이 일이 결코 당신께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고난이나 죽음 같은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주실 것이라 말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당하셨을 때 하셨던 말씀을 여기서 반복하신다. 그때 사탄은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성에서 뛰어내려도 멀쩡할 것이다’라고 예수님을 시험했었다. 시험의 핵심은 ‘능력 종교’의 길을 가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능력을 보여주라는 유혹이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던 말도 다르지 않았다. 고난이나 십자가는 메시아에게 어울리지 않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것을 거부하고 쉬운 길을 가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친 바다 위를 걸으시고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는 분에게 능치 못할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항변 속에는 사탄의 속삭임이 있었다.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 대신 능력을 발휘하여 쉬운 길을 가라는 것이다. 이 유혹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까지 계속됐다.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나 예수님은 그 달콤한 속삭임이, 아니 정당해 보이기까지 하는 요구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일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능력 종교를 기대하고 요구하는 시대정신 속에서, 당신이 고난당하고 죽어야만 하는 메시아임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그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 또한 그런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오늘날에도 기독교를 능력 종교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교회가 세상에서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백번 옳다. 그러나 어떠한 영향력인가가 문제다. 생명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세상이 기대하고 추구했던 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이 부끄러워하고 꺼렸던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이었다.

교회의 영향력은 돌로 떡을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조롱을 견디며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을 통해 나타나야 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저주와 고난의 자리, 수치와 모욕의 자리로 먼저 향하신 주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을 오늘도 그곳으로 이끌고 계신다.

(삼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