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환경 속에서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느헤미야 시절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흉년이 들어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백성들은 밭과 포도원, 집을 저당 잡혔다. 양식을 도저히 구하지 못할 상황에서 과중한 세금 때문에 아들과 딸을 노예로 팔아야 하는 비참한 상황이 됐다.
그때 느헤미야는 먼저 아파하는 이들의 사정을 들었다. 그에게는 듣는 귀가 있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바쁘고 중차대한 일이 있어도 분주하지 않았다. 무엇인가 잘못되는 상황 속 ‘신호’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과 자신에게 맡겨진 백성을 향해 영적 민감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심각한 문제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데도 무디게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도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하는 상황을 언급하신 적이 있다. 그래서 영적 안테나를 민감하게 세우고 문제를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백성들의 호소를 들은 느헤미야는 크게 분노했다. 분노는 부정적 감정이다. 그러나 그 분노가 죄악을 향한다면 그것은 바른 것이다. 하나님은 죄악을 미워하고 분노하시는 분이다. 그러니 분노의 대상이 죄악일 때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때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분노하셨다.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을 향해 채찍을 드셨고, 종교라는 틀로 영혼을 가두며 외식하는 바리새인을 향해 “화 있을진저”라며 외치셨다.
느헤미야도 그랬다. 동족의 죄악을 듣고 그냥 무덤덤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과 상충하는 죄악에 대해 아파하며 분노했다. 사사로운 분노가 아니라 의롭고 거룩한 분노였다.
누군가 ‘이 시대는 화가 많은 시대’라고 했다. 하지만 이 시대의 분노는 의롭고 거룩한 것이 아니다. 의로움을 지키려는 분노가 아니라 이로움을 지키기 위한 분노다. 획 하나의 차이지만 엄청난 차이다.
지난해 미국 사회에서 흑인 인권이라는 의를 외치지만 한쪽에서는 상점을 부수고 약탈하는 불의를 봤다. 인간이 의롭다고 포장하는 분노의 실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때 물질에 노예가 된 가짜 분노가 아닌 의에 속한 참된 분노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상황에 대한 민감성,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죄악을 향한 거룩한 분노 외에 또 한 가지 요청되는 것이 있다. 본문 7절 말씀은 “깊이 생각하고”로 시작된다. 한글개역판 성경에는 “중심에 계획하고”라고 돼 있다.
느헤미야는 귀를 열어 인식했다. 마음으론 죄에 대해 분노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생각했다. 그리고 계획했다. 깊이 있게, 그리고 중심으로 그 과정을 고민했다.
느헤미야는 의식의 흐름을 하나님께 맞췄다. 주님께 해결 방법을 물으며, 잘못되어 가는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 하늘의 지혜를 구했다. 그리고 전략을 세웠다.
그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한다. 성육신하신 예수님도 현실을 인식하셨고 감정을 느끼셨다. 그러나 느낀 감정 그대로 행동하지 않으셨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생각하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힘썼다.
우리는 본문 말씀에서 이 세 단어를 기억해야 한다. “듣다” “노하다” “생각하다.” 무엇인가 잘못되는 일 앞에 우리는 지식과 감정, 의지를 합당하게 반응해야 한다. 거룩한 분노로, 하늘의 지혜로 반응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자. 그를 통해서 잘못된 것이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힘쓰자.
오늘도 하나님 안에서 깊이 생각하자. 그 생각을 시작으로 바른길로 돌아가는 지혜가 하늘에서 부어질 것이다.
(미국 워싱톤순복음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