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어른’ ‘스타특강쇼’ ‘요즘책방: 책 읽어드립니다’ ‘책 읽어주는 나의 서재’.
tvN의 간판 교양 프로그램인 이들은 서울 동작구 보라매공원에서 태어났다. 정민식(47) PD는 그곳에서 매일 아침 한두 시간은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다. 사우나도 또 다른 ‘산실’이지만 코로나19 때문에 가지 못한다. ‘책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을 하면 어떨까’ ‘그 교수님이 나와주시면 어떨까’ 막연했던 아이디어가 매일, 가끔은 두어 달 만에 조금씩 깎여나갔다.
프로그램에 대한 고민은 플랫폼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tvN의 교양 유튜브 채널 ‘사피엔스 스튜디오’가 태어난 곳도 1년 전 보라매공원이었다. 이 채널이 CJ ENM의 디지털 인사이트 플랫폼이다.
뒤늦게 디지털 콘텐츠를 만들려고 한 까닭은 뭘까. 디지털 미디어에 착한 콘텐츠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이 시대에 필요한 건 착한 콘텐츠”라며 “만드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성장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선순환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기존 유튜브 교양 채널이 대부분 개인형이었기에 콘텐츠 전문 조직이 만드는 인문학 채널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다.
사피엔스 스튜디오에는 정답이 없다. 각자의 답을 생각하게 한다. 정 PD는 “지금은 ‘정답의 시대’가 아닌 ‘개인 견해의 시대’인 것 같다”면서 “내 생각이 정답은 아니지만 틀린 답도 아니다. 다른 답일 뿐”이라고 말했다. 제작진이 공유하는 철학도 정답을 가르치는 잘난 척하는 채널이 아니라 ‘전문가의 지식이 콘텐츠 소비자들에게 지혜로 전달되는 채널을 만들자’다.
미디어 산업의 변화에도 대응하고 싶었다. 정 PD는 “TV와 같은 전통 미디어에서 디지털 미디어로 산업환경이 변화하고 있다”면서 “지금이라도 빨리 도전해보고 경험해봐야 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25년차 PD에게도 유튜브의 영상문법은 생소했다. 정 PD는 “TV 콘텐츠가 2초에 한 번 숨을 쉰다면 디지털 콘텐츠는 1초에 한 번 숨을 쉬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호흡만 빨라진 건 아니다. 그는 “TV 콘텐츠는 기승전결이 있고 마지막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전통적 서사 구조를 갖지만 디지털은 ‘결결결결’”이라며 “선행사건과 그다음 사건에 인과관계가 없다. 센 것, 재밌는 것 위주로 편집한다”고 설명했다.
연령대가 갖는 한계도 있다. 그는 “디지털 분야는 저보다 젊은 분들이 접근하기 쉽고 경험도 많이 해봤고 아이디어도 좋다”고 인정했다. 제작 현장에서도 후배들을 믿고 가는 부분이 크다. 정 PD는 “후배들이 만든 콘텐츠를 보면서 ‘호흡이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이 자막이 맞는 거야’라고 묻곤 했는데, 어법이나 방송법과 관계없이 그냥 트렌드에 맞는 단어를 쓰는 거더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2라는 숫자를 2/1(1분의2, 2와 같음)이라고 쓰는 게 유행이라서 후배가 자막에 그렇게 썼더라고요. 바꾸라고 할 수 없었어요. 후배들에게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사피엔스 스튜디오 구독자는 이달 75만명을 넘어섰다. 정 PD는 “MZ세대를 비롯해 요즘 사람들은 선한 영향력, 착한 것, 공정성에 관심을 갖는다”면서 “조금 더 정제된 것, 깊이를 떠나 착한 것을 찾는 시대가 돼 인문학 프로그램을 더 좋아해 주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사피엔스 스튜디오 구독자들의 연령대나 성비 분포는 특이하다. 유튜브 채널은 쏠림 현상이 심하다. 특정 채널 구독자의 연령대는 아주 낮거나 높고 여성이 대부분이거나 남성이 대부분이다. 사피엔스 스튜디오의 구독자는 20대 중반~30대 중반, 30대 중반~40대 중반, 40대 중반~50대 중반이 전체의 25%씩을 각각 차지한다. 성비도 남녀가 반반이다.
정 PD는 “나이와 성별을 떠나 착한 건 다들 좋아해 주고 내가 흡수해서 활용할 수 있는 지혜를 찾는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정 PD가 처음부터 교양 프로그램만 만든 건 아니다. 방송 일은 예능 프로그램 세트장을 만드는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했다. 어쩌다 교양 프로그램에 빠졌는지 물었다. 농담 같은 진담으로 답했다. “제가 진짜 교양머리가 없어서 교양을 배우고 싶어서 그랬고요, 하다 보니까 이게 더 재밌는 거 같아요. 나쁜 놈이죠. 제 머릿속에 없으니까 남의 걸 훔쳐다가 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요즘은 교양과 예능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정 PD는 “후배들한테 ‘우리 프로는 교양 아니야, 예능이야 인문예능’이라고 말할 때가 많다”면서 “예능인이 하는 게 아니라 교수님들이 하는 예능, 웃기는 예능이 아니라 머리를 즐겁게 하는 예능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만든 프로그램은 유독 책에 관한 게 많다. ‘책 읽어주는 나의 서재’는 강연자에게 “당신에게 책이란”하고 질문하며 시작된다. 정 PD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자 “생명줄”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책으로 콘텐츠 만들어서 월급 받으니까요.(웃음) 사람들이 제가 책 되게 좋아하는 줄 아시는데 생각보다 많이 안 봐요.”
정 PD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왜 내가 이 책을 꼭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 하지’하는 의문이 항상 있었다”며 “필요할 때 필요한 부분만 봐도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안 보는 것보단 그렇게 보는 게 낫지 않냐”고 되물었다. 강연을 재밌게 하는 전문가들이 책의 내용과 관련된 이야기를 전해주는 그의 프로그램도 이런 생각에서 비롯됐을 수 있다.
착한 콘텐츠에 대한 그의 관심은 환경 분야로도 뻗어 나갔다. 오는 10월 사피엔스 스튜디오가 여는 ‘인포테인먼트 환경 콘퍼런스’는 정 PD가 5년 전부터 구상한 행사다. 정 PD와 함께 오랫동안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들이 나선다. 배우 김상중, 가수 이적이 진행을 맡고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 건축가 유현준 교수,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 등이 강연한다.
정 PD는 인터뷰 동안 ‘지혜’라는 단어를 자주 썼다. 이유를 묻자 바로 답이 돌아왔다. 그가 콘텐츠를 만드는 이유와 같았다. “지식이 있으면서 착한 사람이 있고, 지식이 있는데 나쁜 사람도 많아요. 지혜가 있고 착한 사람은 있지만 지혜가 있는데 나쁜 사람은 생각보다 적어요. 지식은 말 그대로 식(識)이고 지혜는 마음이라 생각해요. 지식을 통해 마음을 나눴으면 좋겠어요.”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