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뚫리면 균형발전?… 인프라 구축만으론 지방소멸 못 막아 [이슈&탐사]

입력 2021-06-17 04:05 수정 2021-06-17 09:28
정부 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균형발전예산) 가운데 약 3조원이 해마다 도로·철도 등 인프라 건설에 쓰이지만 현재 지방소멸 위기는 인프라 개선으로 대응할 수준을 넘어섰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사진은 경남 밀양 나들목(IC) 구간의 모습. 이 장소는 균형발전예산과는 상관이 없다. 뉴시스

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균형발전예산)가 가장 많이 쓰이는 곳은 인프라 구축이다. 국민일보 취재팀이 기획재정부 ‘열린 재정’ 사이트를 통해 2008년부터 올해까지 14년간 정부 중앙부처에서 편성한 균형발전예산 현황을 살펴본 결과 전체 예산의 약 30%가 도로·철도·상하수도 등 사회간접자본(SOC) 건설에 쓰인 것으로 조사됐다.


14년간 중앙정부 예산 134조8200억원 가운데 도로·철도 등을 만드는 ‘교통 및 물류’ 분야 예산은 24조4500억원으로 균형발전예산 13개 분야 중 가장 큰 비중(18.1%)을 차지했다. 지방하천 정비 등을 수행하는 ‘국토 및 지역개발’ 분야에도 19조8000억원(14.7%)이 쓰였다. 도서관이나 체육시설과 같은 생활 편의시설을 짓는 비용을 제외하고도 이렇다.

도로 더 깐다고 지방 발전할까


부처별로는 국토교통부가 가장 많은 균형발전예산을 가져다 쓰고 있다. 해마다 3조원 안팎의 예산을 국토부가 쓴다. 정부 부처 가운데 14년 연속 1위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들은 대부분 ‘O개년 계획’ 이름의 중앙집권적 사업이다. 정부가 세운 중장기 계획에 맞춰 비슷한 시설을 전국 각지에 만든다. 각 지역의 발전을 위해 명확한 목적으로 추진된다고 보기 어렵다.

올해 2569억원이 배정된 ‘국가지원지방도건설’ 사업의 경우 2003년부터 4차에 걸쳐 시행된 ‘국지도 5개년 계획’에 따른 것이다. 경북 영주 단산-부석사 국지도 건설 등 61개 사업에 예산이 투입된다. 공사비 전액이 균형발전예산으로 진행되는 구미국가산단진입도로(2003억원), 아산탕정산단진입도로(821억원) 등 ‘산업단지 진입도로 지원’도 1994년부터 시행되던 사업이다. 균형발전예산 편성 전까지 일반회계나 교통시설특별회계(교특회계)로 진행되던 사업이 회계명만 ‘균형발전’으로 바뀌며 벌어진 일이다.

통상적으로 교통과 도시 발전은 서로 맞물린 관계로 해석된다. 교통이 뚫리면 도시가 발전하고, 도시가 발전하면 교통량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인구가 감소하는 지방 도시의 경우 이런 선순환이 일어나기 쉽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인구 과소 지역의 경우 교통과 도시 발전의 연관성이 낮다”며 “도시 인구 감소(축소 도시) 문제를 먼저 겪은 일본은 기존에 있던 도로를 없애곤 한다. 통행량이 적고 국가가 관리를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특히 전국 시·군·구 46%가 30년 뒤 소멸 위험에 놓인 현재 상황은 단순히 인프라 건설 정도로 해소될 수준을 넘어섰다는 지적이다. 이상호 한국고용정보원 지역일자리팀 부연구위원은 “낙후된 지역에서 균형발전예산으로 진행되는 사업은 상하수도, 도로 건설 등이 많다”며 “기본적인 도시 인프라를 전국에 뿌리듯이 하는 건 1970~80년대 농어촌 낙후 지역들이 많을 때 쓰던 전통적인 방식이다. 현재 지방 소멸 위기는 그 정도로 대응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고 말했다.

균형발전예산으로 지역 SOC 수요를 충당하는 동안 본래 쓰여야 할 교특회계는 남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교특회계는 도로나 철도, 공항, 항만 확충을 위해 편성하는 예산이다. 2017년 6000억원 수준이던 교특회계 잉여금은 2018년 약 6조원, 2019년 약 3조7000억원이 공공자금관리기금(공자기금)에 예탁됐다. 국회예산정책처는 “교특회계는 여유 재원이 발생하고, 균특회계는 재원 부족으로 일반회계 추가 전입이 이뤄진다”고 지적했다. 교특회계를 다 쓰지 못하자 차라리 노후 SOC를 보수하는 데 사용하자는 말까지 나왔다. 이원욱 민주당 의원은 2019년 3월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교특회계 이름을 교통 및 안전특별회계로 바꾸고 안전에 투자하자. 목적대로 쓰지 못하는 돈을 국민 안전에 쓰자”고 제안했다.

정치권의 표심잡기가 낳은 결과

균형발전예산이 각종 인프라 사업에 장기간 묶이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국지도 건설 사업은 통상 5~9년, 광역철도 건설 사업은 10년 넘게 예산이 배정되는 경우가 많다. 연간 10조원 수준의 균형발전예산 중 3분의 1이 인프라 사업에 투입되며 새로운 사업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박진경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 4월 국회에서 열린 ‘지방소멸방지 특별법’ 공청회에서 “전체 (균형발전) 사업 자체가 인프라 위주로 가다 보니까 그 사업이 끝날 때까지 다른 사업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지금까지 균형발전 정책이 인프라 위주로 진행된 것은 지역 주민의 요구와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란 해석도 있다. 지역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선 기업을 유치하는 것이 가장 유리하지만 세금 혜택 등 여러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다. 반면 도로나 상하수도 건설은 예산을 따오면 곧바로 표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수도권·비수도권을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현상이다. 민주당 소속의 경기도 안산시 국회의원 4명은 지난 10일 기자회견을 열고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C노선을 안산에 유치해 시민의 오랜 염원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여기엔 현직 행안부 장관인 전해철 민주당 의원도 이름을 올렸다. 심교언 교수는 “인프라 건설은 정치인들이 자기 성과를 홍보하기에 가장 쉽고 편리한 방법”이라며 “적어도 20, 30년 뒤를 내다보고 중장기적으로 균형발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예산이 쓰여야 한다”고 말했다.

권기석 양민철 방극렬 권민지 기자 listen@kmib.co.kr

[이렇게 수도권 공화국이 됐다: 114조 균형발전 예산 대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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