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교수직 떼고 전업작가”… 강준만의 집필실을 가다

입력 2021-06-17 19:46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가 지난 10일 전북 전주시 덕진구 한 오피스텔 빌딩 2층에 있는 개인 집필실에서 책을 찾고 있다. 강 명예교수는 일하는 대학 근처에 자료실과 서재로 구성된 집필 공간을 마련해 놓고 30년 넘게 쉼없이 저술 작업을 해왔다. 지난 2월 정년퇴직 후에는 더 많은 시간을 집필실에서 보내고 있다. 전주=김지훈 기자

지난 2월 정년퇴직한 강준만(66) 전북대 명예교수는 이달 1인 정치비평 매체 ‘인물과사상’을 복간한 ‘THE 인물과사상’ 첫 호를 선보이며 전업작가로서 새 출발을 알렸다.

강준만은 지난 30여년간 200권 가량의 책을 썼다. 동시대 한국인 중에 그보다 책을 많이 쓴 이는 찾기 어렵다. 그렇게 많은 책을 쓰고도 더 쓰고 싶은 책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좀더 공부해서 좀더 좋은 글을 쓰고 싶다.”

다작, 실명 비판, 1인 매체 등 강준만의 저술 작업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한국 지식 생산 시스템에서 비슷한 예를 찾기 어렵다. 그의 글쓰기가 학술적이라기보다 저널리즘에 가깝고 기사·자료 인용 중심이라는 점이 다작의 비결로 해석되긴 한다. 그렇지만 한 지식인이 30년 넘게 높은 생산성을 유지하며 중요한 의제들을 던져왔다는 점에서 강준만은 감탄과 궁금증의 대상이 돼왔다.

지난 10일 전주 전북대 인근의 낡은 오피스텔 건물 2층에 있는 강준만의 집필실을 방문했다. 언론에 집필실을 공개한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문을 여니 자료실과 서재, 화장실로 구성된 제법 큰 공간이 나왔다.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자료실은 사람 하나 지나다닐 길만 빼놓고 서가들이 빼곡했다. 글을 쓰는 공간인 서재도 벽면은 온통 책과 서류봉투로 채워져 있었다. 책상, 의자, 에어컨, 공기청정기, 정수기 등은 하나같이 오래돼 보였다. 책상 위 데스크톱 컴퓨터와 프린터 역시 구형이었다. 책상 뒤쪽 창문에는 햇빛을 막으려는 듯 신문지 몇 장이 붙어 있었다.

지독할 정도로 건조하고 기능적인 공간이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액자나 사진, 장식물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강준만이라는 이름도, 현판 같은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글 감옥’이란 게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일하던 대학과 집, 집필실은 모두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라고 한다. 그렇게 삼각형의 꼭짓점처럼 세 공간을 배치해 놓고 글을 써왔다. 퇴직 교수 강준만은 오전 10시쯤 집필실에 나와서 오후 6시쯤 집으로 들어가는 생활을 한다. 31년 넘는 교수 생활을 마치고도 따로 여행이나 휴식을 하지 않았다. 명예교수는 학교에서 강의할 수 있지만 그것도 거부했다. “일 중독자.” 강준만은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했다.

오랜 세월 정치에 대한 글을 쓰면서도 그는 정치인이나 기자, 정치평론가들과 교류하지 않았다. 골방에서 혼자 자료에만 의존해 쓰는 방식을 고수했다. 그는 “정치 관계자들을 아예 만나지 않고 인간관계도 없다”면서 “공개된 발언만 갖고도 얘기할 게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THE 인물과사상’에 쓴 김종인론을 소개했다.

“김종인에 대해 수많은 기사가 있다. 내가 보니 놀라운 성과를 내고도 매번 배신을 당하더라. 이게 뭐야. 왜 이러지. 기자들은 이런 질문을 안 던진다. 내가 회고록 읽고 기사 찾아보니까 알겠더라. 아, 이 분은 단독자구나. 기자들은 이런 분석까지 안 들어간다.”

‘거리두기’는 그가 오랜 세월 정치 비평을 하면서도 객관성을 유지해온 조건이다. ‘김대중 죽이기’ ‘노무현과 국민사기극’ 등 강준만이 쓴 책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탄생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언론개혁, 수도권 집중 타파 등 그가 강조한 의제들은 민주당 정부의 정책과도 통한다. 그러나 강준만은 민주당 정권이 세 차례 이어지는 동안 정치에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정치나 공직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를 “귀차니즘 때문”이라고 짧게 설명했다. 공직이 주는 막중한 책임감이 두렵다고도 했다. 자신이 뱉어놓은 말이 너무 많다는 얘기도 보탰다.

전주=김지훈 기자

“나이가 드니까 운동을 해야 하는데 주변에서 골프를 많이 권했다. 그런데 골프는 못 하겠더라. 예전에 교수들 골프 좀 치지 말라는 얘기를 내가 참 많이 했거든. 폴리페서 비판은 또 얼마나 많이 했나. 그런데 그걸 내가 어떻게 하나.”

강준만은 1997년 ‘인물과사상’을 창간해 2005년까지 총 33권을 발행했다. 주제나 시한, 분량 등의 제한에서 자유로운 1인 매체는 강준만의 자유로운 글쓰기, 용감한 글쓰기를 가능케 한 또 하나의 조건이었다. 이 매체를 되살린 ‘THE 인물과사상’이 그의 새로운 플랫폼이다.

강준만은 “인물 탐구를 더 깊게 해보려 한다”면서 “사람에 대한 탐구, 그게 설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비판 문화나 양식이 바뀌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고 덧붙였다.

“정치 비판을 보면 정확하지 않거나 과장돼 있다. 선의의 해석이 빠져 있고. 그냥 ‘너 죽어라’, 이거다. 그러니까 비판의 효과가 안 난다. 비판이란 원래 교정 가능성을 여는 것이다. 반면 같은 편에서 하는 비판은 ‘너 잘해라’다. 선의의 해석이 들어가고, 내부 멘탈리티나 체제를 아니까 좀더 정교해진다. 문제는 같은 편에서는 비판할 게 있어도 상대 진영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에 안 한다는 점이다. 또는 다 망가진 다음에야 비판한다.”

극렬하지만 효과는 없는 비판 문화 때문에 정권이 실패하고 이전 정권의 실패에 기대 새로 정권을 잡는 역사가 반복된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가 내놓은 대안은 내부 비판이 중심이 되는 비판 문화다.

“‘조국흑서’는 같은 진영에서 나온 비판, 내부 비판이었다. 이런 게 ‘뉴노멀’(새 기준)이 되고, 상대편을 죽어라 때리는 비판이 ‘애브노멀’(비정상)이 되는 건 안 될까.”

이 말은 강준만의 변화를 설명해 주기도 한다. 그는 “나 보고 변절했다고, 배신했다고 얘기하는데 그들에게 당신의 비판관이 잘못됐다고 얘기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왜 한 정부를 지지하면 모든 걸 다 지지해야 되느냐”고 물으면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얘기를 꺼냈다.

“조국이 인간적으로 너무 안 됐다. 그렇지만 조국이나 지지자들이 이 문제를 왜 자꾸 10대0으로 보자고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엔 (잘한 점과 못한 점의 비율이) 6대4나 7대3이다. 윤석열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를 6대4나 7대3으로 보면 답이 훨씬 선명하게 나온다. 그런데 ‘너 어디야, 서봐’ 이러니까 갑갑하다.”

강준만의 비판이 같은 편을 향한 ‘너 잘해라’로 바뀌면서 독자들도 떨어져 나갔다. 강준만의 저술 작업은 더욱 외로워졌다. 하지만 그는 “더 자유로워졌다”고 말했다.

전주=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