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이번엔 “광화문 서민금융진흥원서 뵙겠습니다”… 간 커진 피싱

입력 2021-06-16 04:02

정부기관을 사칭해 저금리 대환대출(대출 갈아타기)을 미끼로 돈을 뜯어낸 보이스피싱범의 대담한 행각이 발각됐다. 범인은 정부 기관이 입주한 건물에서 대출 상담 약속을 잡으며 피해자의 의심을 피해 송금받았다. 그러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상담원이 기지를 발휘해 2차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지난 3월 자영업자 A씨(58)는 ‘자산관리공사 서민금융지원부 박기석 팀장’으로부터 대환대출을 권유하는 문자를 받았다. 현재 저축은행과 카드사 등에서 고금리로 실행된 기대출 2000만원을 저금리 상품으로 대환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박 팀장은 A씨에게 “이미 대출된 금액 2000만원을 대환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1000만원을 현금 수납해야 한다”면서 체크카드와 비밀번호를 넘긴 뒤 해당 체크카드가 연결된 계좌에 현금을 입금하라고 요구했다. 범인의 지시에 따라 A씨는 범인이 보낸 퀵서비스 기사를 통해 체크카드를 넘겼고, 일차적으로 ‘선금’ 600만원을 입금했다.

전형적인 보이스피싱 수법이지만 정부 기관을 도용한 게 A씨의 믿음을 샀다. A씨는 “기존에 서민금융진흥원(서금원)에 대출상품 상담을 신청했던 적이 있어 비슷한 기관에서 연락이 온 것으로 생각했다”면서 “기관 이름이나 직책도 구체적이어서 전혀 의심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최근 보이스피싱 조직들은 인터넷 검색 이력 등을 이용한 맞춤형 광고 시스템을 악용해 A씨같은 ‘타깃’을 고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흘 후 A씨는 350만원을 추가로 입금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때 미심쩍음을 느낀 A씨는 “직접 만나서 대출 관련 설명을 듣고 싶다”고 요구했고, 박 팀장은 “현재 서울 광화문 한국프레스센터 6층 서금원에서 근무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만나자”고 답했다. A씨는 박 팀장과 프레스센터 6층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당일 오전에 ‘잔금’ 350만원을 계좌에 다시 입금했다. 그리고 약속 시각보다 일찍 도착한 김에 서금원에 들어가 ‘박 팀장’을 찾았는데, 돌아온 답변은 “그런 사람은 근무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사색이 된 A씨를 본 종합상담사는 곧바로 보이스피싱 사건임을 감지하고 A씨가 입금한 은행에 사건 발생을 알리고 출금 정지를 요청, 계좌를 동결했다. 이어 신고를 받고 출동한 보이스피싱 전담 경찰관과 범인을 잡기 위해 잠복했으나 범인은 연락을 끊고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A씨는 “건물에서 내 움직임을 보고 수상하다고 느낀 범인이 낌새를 눈치채고 도주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정책금융을 사칭하는 등 보이스피싱 수법이 날이 갈수록 치밀해지고 있긴 하지만 범행 장소로 정부 기관을 이용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는 게 서금원 측 설명이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15일 “주요 사기 사례가 널리 알려지며 성공 확률이 낮아진 보이스피싱 조직들이 더 구체적이고 정교한 수법을 개발하고 있다”면서 “정부 기관 건물이 갖는 물리적인 상징성을 생각하면 피해자의 경계심은 무뎌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금원 관계자는 “정부 정책금융기관은 절대 대출 등을 이유로 카드, 통장, 비밀번호는 물론 현금 수납을 요구하지 않는다”면서 “아무리 급전이 필요하더라도 금전과 관련해서는 원론적인 방법을 지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김지훈 기자 germa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