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동굴 목소리

입력 2021-06-16 04:05

하루는 길가에 서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여서 그런지, 햇살이 뜨겁고 동네가 조용해서 그런지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잠시 가로수에 몸을 기대어 잠들까 싶은 찰나에 잠을 깨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 옆을 지나가는 한 남성의 통화하는 목소리였다. 그는 배우 이선균의 매력으로 꼽히는 동굴 목소리처럼 굵고 짙어서 깊이 빠져들 것 같은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그 목소리에 홀려 남성이 사라진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듣기 좋은 목소리를 타고난다는 건 복이다. 목소리 하나만으로 한 사람에게 강하게 끌리기도 하고 호기심이 유발되기도 한다. 나의 등단작 시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나 스스로에게 ‘수국의 즙’ 같은 목소리를 갖고 싶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 문장 하나 때문에 내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걸어온 시인들이 많았다. 도대체 수국의 즙 같은 목소리가 어떤 건지 궁금해 참을 수 없었다면서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평소에 가지고 있는 목소리보다 조금 더 매력적으로 들리게끔 노력하곤 했다. 이와 비슷한 전화를 계속 받아오면서 나는 내 목소리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목소리는 타고나야 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꼈다.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내 목소리에 지쳐 모든 힘을 빼버리고 말았다. 쇠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를 하루아침에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로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 깨달음은 정답에 가깝지 않았다. 어느 식당에서 카운터 직원에게 이것저것 질문하는 이름 모를 사람의 목소리에 홀린 적 있었다.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여서 그런 게 아니라 식당 직원에게 예쁜 단어만 사용해 상냥히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을 계기로 나는 좋은 목소리가 얼마나 상냥하게 말하는지와 비례한다고 생각했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목소리는 친절하고 상냥한 말투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이다.

부다페스트(헝가리)=이원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