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재 목사의 ‘생명 설교’] 그는…

입력 2021-06-16 03:08

본문 14절 말씀 속 예수님은 구약과 신약시대, 그리고 오늘까지 이 땅에 있는 어떤 인간 대제사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우리의 속죄를 위한 완전한 제물이 되셨고 모든 희생 제사의 완성이 되셨다.

또 그는 부활 후 승천하신 이시다. 그는 승천하시어 모든 세계를 다스리는 열방의 통치자, 역사의 주관자가 되셨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한마디로 그는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경이로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하신다. 우리와 상관없는 저 먼 곳에 계시지 아니하며 우리와 동행하신다. 이렇게 함께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그분을 떠나지 않고 굳건한 신앙고백으로 그분을 끊임없이 인정하고 높여드리는 것이다. 그가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진정성 있는 믿음으로 그를 굳게 붙잡고 삶의 여정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이셨지만 이 땅에 계실 때는 완전한 사람이기도 하셨다. 그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으셨으며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사탄은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죄로 실족시키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유혹에 넘어지지 않았고 죄에 굴복하지도 않았다.

만약에 우리가 이런 예수님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과하면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을 향해 정죄와 판단을 쏟아붓는다. 그러나 그는 정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15절의 말씀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셨다.

그는 사랑이시다. 이렇게 완전하게, 변함없이,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우리의 마땅한 도리는 무엇이 되어야 하겠는가. 우리의 부족함과 못남과 약함까지도 사랑하시는 그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16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은혜의 보좌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히 여기심의 근원지다. 그러나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보좌는 두려움의 장소이기도 했다. 온전한 대속이 없었기에 보좌에 충만한 영광은 죽음의 공포를 수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우리의 죄를 속량하신 예수님의 인도는 우리를 은혜의 보좌를 향해 담대히 나아가게 하는 능력이 되었다.

또 예수님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이라면 때의 중요성을 실감할 것이다. 비가 내려야 할 때와 햇살이 뜨겁게 비춰야 할 때가 있다. 모든 때가 정확해야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은 이처럼 완전한 은혜가 우리의 삶에 마르지 않도록 섬세히 인도하신다.

예수님, 그는 인도자이시다. 이와 같은 신실한 인도자가 우리에게 있는데 왜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특권을 사용하지 않고 낭비하는가.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가. 또 우리의 모든 필요를 돕는 분이 계시는데 왜 그를 의지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 그 은혜를 누리라. 시편 146편 3절 말씀처럼 세상 권력을 가진 높은 사람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도 의지하지 말고 삶의 모든 순간에 우리를 도우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라.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이 세상에 많은 길이 있다. 그 길 중에는 제법 좋아 보이는 길도 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주는 길은 오직 한 길밖에 없다.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와 같은 아버지의 집에 머문다면 우리는 영원한 안식과 쉼,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윤창재 미국 워싱톤순복음제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