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말이다. 대학에서 ‘패션 창업’이라는 과목을 가르친 지 벌써 4년째다. 산업 지형이 바뀌면서 거창한 스타트업이 아니라도 작게 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그럴 때 알아둘 것들을 함께 공부한다. 호기롭게 창업했다가 실패할 경우 금전적 손실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상처가 클 테니까 실패 가능성을 최대한 낮추기 위해 점검하고 대비할 것을 많이 얘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창업의 백미는 역시 ‘차별성’이다. 만들겠다는 물건이나 서비스는 뭐라도 좋아야 한다. 이전에 본 적 없는 기발한 아이디어까지는 아니라도 질이 좋든가, 가격이 저렴하든가 우리 가게의 강점이 무엇인지 손님에게 얘기할 포인트가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
소비자에게 어필할 참신한 포인트를 찾아내는 방법은 다 다르다. 문득 떠올릴 수도 있지만 경쟁 제품을 조사하다가 찾기도 한다. 그래서 학기말 과제에서는 구체적인 목차나 양식을 정해주는 대신 한 학기 동안 검토한 내용 중에서 핵심 가치 하나를 찾고 그걸 다듬어 보여 달라는 다소 막연한 주문을 한다. 그러면 언제나 황망한 표정과 함께 구체적인 가이드를 달라는 요구가 이어진다. 그럴 때 나는 모르겠으니 알아서 하라고 던져 놓을 때와 몇 샘플을 보여줄 경우 결과는 확연히 다르다.
흰 종이에 무턱대고 그림을 그리라고 했을 때는 고생스러웠겠지만 참신하고 희한한 아이디어들이 제법 많이 나오는데, 잘된 사례를 보여주는 순간 비슷비슷한 형식에 거기서 거기인 내용만 보인다. 학생들을 마음껏 괴롭히기에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강의라서 요즘은 꼭 들어가야 할 내용, 몇 페이지 내외, 채점 기준 같은 걸 적어주며 학생들의 창의력을 잠재우고 있다. 의무적인 목록이 나열되면 그걸 채워 넣는 동안 상상력은 어디론가 날아가는 모양이다. 어디 학기말 과제만 그렇겠나. 우리 모두 해야 할 일들을 해내느라 정작 나의 강점 따위는 스쳐 보내고 있는 게 아닌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윤소정 패션마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