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이 달라졌다. ‘범여권’ ‘민주당 2중대’라는 규정에서 벗어나 원내 유일 진보정당으로서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거여(巨與) 더불어민주당의 입법 독주를 비판하고, 주요 현안마다 민주당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대안 정당으로서 존재감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일각에서는 정의당의 변신이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이 비례위성정당을 설립하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진 데서 비롯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또 압도적 의석을 차지한 민주당이 과거와 달리 정의당과의 전략적 공조가 불필요해지면서 정의당의 독자노선이 가능해졌다는 시각도 있다.
확 달라진 정의당
정의당 핵심 관계자는 11일 “민주당은 이제 다른 당의 도움 없이도 마음만 먹으면 모든 법안 처리를 할 수 있게 됐다”며 “노동존중이나 기후변화 등 집권여당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의당의 ‘거여 견제’는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지명한 장관급 인사들을 잇달아 ‘데스노트’에 올린 게 대표적이다. 정의당은 김오수 검찰총장 후보자부터 임혜숙 과학기술정보통신부·박준영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를 모두 ‘데스노트’에 올렸다. 김 후보자와 임 장관은 임명을 강행했지만, 박 장관은 결국 낙마했다.
민주당이 법안을 단독으로 처리하거나 정책적 결정을 내릴 때마다 날 선 발언도 서슴지 않고 있다. 지난달 민주당 부동산특별위원회가 재산세를 완화하는 방안의 대책을 마련하자 “부동산 기득권 대표 정당이라는 솔직한 자기 고백”이라고 비판하는가 하면, 민주당이 2차 전국민재난지원금을 띄우자 “소상공인·자영업자에게 절실한 손실보상은 제쳐두고 느닷없이 전국민재난지원금을 언급한다”고 비판했다.
두 정당이 21대 국회 들어 격하게 대립한 때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재법) 처리를 두고서다. 중재법은 정의당이 당론 1호로 정했던 법안이다. 소관 상임위원회인 법제사법위원회에 소속 의원이 없는 정의당은 중재법 심사를 위한 회의가 열릴 때마다 회의장 밖에서 항의했다. 막판 중소벤처기업부 등 부처 의견을 반영한 최종안이 도출되자 정의당은 “기업살인방조법에 가깝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지난 20대 국회에서 보여준 전략적 동반 관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비례위성정당이 낳은 ‘범여’ 균열
2019년 민주당과 정의당은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법안 처리를 위해 긴밀히 공조했다. 문재인정부의 숙원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설치법(공수처법)과 소수정당의 대표성을 높이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내용의 공직선거법 개정안 처리를 위해서는 범여권의 결집이 필요했다.
하지만 패스트트랙 국면에서 불거진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는 정의당에 큰 위기로 작용했다. 정의당은 조 전 장관 임명에 찬성했고, 이는 자충수가 됐다. 심상정 당시 당 대표는 2019년 9월 “검찰이 조 장관에 대해 사생결단하듯 무리한 수사를 밀고 가고 있다”고 했다. 적극적으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대신 검찰의 수사 행태를 문제 삼으며 비껴간 것이다.
정의당 내에서는 권리당원의 탈당이 이어졌다. 정의당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까지 11월 탈당계를 제출하며 “당에서 받은 감사패를 쓰레기통에 버렸다”며 맹비난했다. 여영국 정의당 대표는 지난 3월 조 전 장관 사태에 대해 “국민으로부터 불신을 받게 된 큰 출발이고 배경이었다”며 “정의당은 국민의 뜻에 응답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회고했다.
민주당이 총선을 앞두고 비례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을 창당하면서 정의당과의 공조체제도 무너졌다. 실제 민주당 자체 분석 시나리오에 의하면 민주당이 비례정당을 만들지 않을 경우 예상되는 정의당의 의석수는 9석이었다. 당시 예상 의석수는 10~15석까지도 거론됐었다. 선거법 개정안에 정의당이 사활을 걸었던 이유다. 민주당은 정의당에 비례연합정당 합류를 제안했지만, 심상정 대표는 “국민의 표를 도둑질하는 꼼수 정치에 정의당이 몸을 담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선거 결과 정의당은 20대 국회 때와 똑같은 6석을 얻는 데 그쳤고, 민주당은 176석의 거대 여당이 됐다.
견제하는 진보 정당, 여당은 응답할까
거대 여당 시대에 정의당이 선명한 진보의 길을 선택하면서 ‘범여권’으로 규정됐던 양당의 관계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게 정치권 안팎의 시각이다. 최근 정의당이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행보에 감정적인 부분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인식도 민주당 내부에 존재한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예전에는 정치적 동지라는 인식이 강해 조언도 편하게 구하곤 했었는데 요즘에는 분위기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과 문정복 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13일 김부겸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표결을 위해 열린 본회의에서 벌인 언쟁은 두 정당 사이에 깊어진 감정의 골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문 의원은 “류 의원이 도발했다”고 주장했고, 류 의원은 문 의원이 ‘꼰대질’을 했다며 “분명한 행패”라 맞섰다. 둘의 언쟁은 양당의 감정싸움으로 번졌다.
하지만 정의당은 이런 해석에 선을 긋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실패를 발판 삼아 대안 정당으로서 여당을 견제하는데 충실할 뿐이라는 것이다. 강민진 청년정의당 대표는 “민주당과 정의당의 지지층이 겹치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며 “하지만 그런 토대 위에 계속 발을 딛고 있는 이상 지난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라고 말했다.
양당 간 긴장감이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목소리도 민주당에서 나온다. 민주당의 한 지도부 인사는 “어떤 현안에 대해 정의당이 반대하면 우리 당 내부서도 ‘정의당까지 반대하는데 밀어붙여야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온다”며 “우리 당이 민심과 동떨어진 것은 아닌지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된다”고 했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