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은 패션이다] 전공·취미를 작품 소재로… 인생도 코미디도 “자연스럽게~”

입력 2021-06-12 04:06
구급차가 도착하면 의료진은 먼저 환자의 감각과 의식을 체크한다. 둘 다 반응이 없을 때 의사는 엄숙하게 말한다. “운명하셨습니다.” 예능프로그램도 의학드라마와 비슷한 면이 있다. 감각(즐거움)은 살아있는데 의식(깨달음)이 몽롱하거나 반대로 감각은 무딘데 의식이 과잉이라면 문제가 생긴다. 균형감각을 잃지 않아야 사람도 프로그램도 건강하고 장수한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제공

예능의 수명을 좌우하는 건 모름지기 시청자의 반응이다. 요즘 PD들은 실시간으로 인기의 추이(호불호)를 살필 수 있다. 댓글 마당에선 무소식이 희소식이 아니다. 반응이 없으면 막을 내려야 한다. 버텨낼 재간이 없다. 웃기는 얘기지만 PD가 망(望)하는 순서가 있다. 처음엔 소망, 희망에서 점차 실망, 절망으로 바뀐다. 진심을 몰라주는 시청자를 원망도 하고 같은 시간대에 잘나가는 프로와 맞붙으면 잠시 선망의 단계를 거치기도 한다.

홈페이지도 없고 누리꾼도 없던 시절에 시청자의 직접적인 반응은 어떻게 알아냈을까. 시청률 조사도 전화로 하던 시절엔 열혈시청자가 방송사에 직접 연락을 했다. 대체로 격려보다는 격노의 전화가 많았다. 흥분한 시청자가 담당자를 바꾸라고 언성을 높이면 겁먹은 담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제가 담당자는 아니지만 내용은 그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내가 받은 전화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내용이 있다. ‘일밤’(일요일 일요일 밤에)을 연출할 때 시청자 반응이 가장 뜨거웠던 꼭지는 ‘이경규의 몰래카메라’였다. 그는 작전(?)을 개시할 때 늘 이렇게 말했다. ‘몰래카메라를 사랑하시는 국민 여러분. 제가 지금 나와 있는 이곳은…’ 여기서 ‘국민’이라는 말이 의식 있는 시청자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아니 국민이란 말을 이렇게 함부로 써도 되는 겁니까.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몰카를 사랑한다고 도대체 누가 보장합니까. 몰카 싫어하면 국민도 아닙니까.” 이럴 때 쓰라고 배운 말이 언즉시야(말인 즉 옳다), 유구무언(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이다. 인정과 겸손은 분쟁을 줄인다. “그럼 선생님 어떻게 바꾸는 게 좋을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그건 당신들이 알아서 해야죠.” 전화를 끊고 회의에 들어갔다. ‘몰래카메라를 사랑하시는 일부 국민 여러분’ 아무래도 이건 좀 이상하다. 결국, 그다음 주 녹화부터 이경규는 ‘몰래카메라를 사랑하시는 시청자 여러분’으로 인사를 바꿨고 항의는 중단됐다.

‘국민 개그맨’ 이경규가 데뷔한 지 올해로 40년째다. 그는 방송 3사에서 8번의 연예대상을 받았다.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 그는 지난해 9월 카카오TV 오리지널로 처음 발표한 프로그램 중 하나인 ‘찐경규’로 디지털 예능에 첫 발걸음을 뗐다. 부캐 전성시대를 거스르며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제공

지금 이경규를 국민 개그맨이라고 부른다면 혹시 누군가 이의를 제기할까. 그가 데뷔한 지 올해로 정확히 40년째다. 약력을 보면 어딘가에 제1회 MBC개그콘테스트에서 은상을 받았다고 나와 있다. 팩트체크를 위해선 화면을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화면이 없다. 이 대회를 라디오에서 개최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혹시 녹음테이프가 남아있을까. 그것도 없다. 그러면 어디서 어떻게 확인할까. 불행 중 다행으로 화면 대신 지면이 남아있다. 1981년 6월 3일자 경향신문은 이 행사에 관해 비교적 상세히 보도했다. 이제부터 ‘이경규의 뿌리를 찾아서’ 걸음을 옮겨보자.

81년 6월 1일 문화체육관에서 ‘81 MBC개그맨콘테스트’가 열렸다. 이게 팩트의 출발이다. 제1회는 나중에 갖다 붙인 말이다. 정확하게는 개그콘테스트가 아니고 개그맨콘테스트다. 신문기사의 제목은 ‘81 MBC개그맨콘테스트 대상에 최양락군 뽑혀’다. 대상 상금은 30만원이었다. 대회의 취지도 기사에 나와 있다. ‘건전한 웃음의 발굴과 침체된 방송코미디와 개그의 질적 향상’이 캐치 프레이즈였다. 무슨 방송세미나의 소논문 제목 비슷한 느낌 아닌가.

승자독식(The Winner Takes It All)은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기사 대부분이 대상 수상자 한 명에 집중됐다. 기획 의도가 그래선지 출연자의 개그 소재도 다분히 학구적이었다. ‘직업에 있어서의 시간과 공간’이란 제목으로 출전한 최양락(20)군은 충남 온양이 고향이며 온양고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예술전문대 연극과 1년에 재학 중.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가르쳤던 모든 담임선생님께 이 기쁨을 전하고 싶다는 순박한 수상소감과 함께 신문은 개그 내용까지 친절하게 실었다. 직업에 따라 권투경기 등을 보는 각도가 다르다며 이를테면 수학 선생은 ‘때린 주먹을 X라고 보고 얻어맞은 턱을 Y라고 한다면 X+Y=다운이라는 등식이 나오는데 다운되지 않는 것을 보니 예습과 복습을 충실히 안 했군’ 그에 반해 관상대 통보관(지금의 기상캐스터)은 ‘한국선수는 저기압의 영향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아 곳에 따라 한두 차례 맞는 분포를 보이고 있습니다. 관중들의 태도는 비교적 잔잔하지만, 후반에 갈수록 흥분의 물결은 다소 높게 일겠습니다.’ 이걸 최양락 톤으로 읽는다고 가정해보라. 재미있지 않았겠는가.

제작진의 이름도 말미에 등장한다. 박영일 김건영 PD. 애석하게도 박영일 선배는 바로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행사장(문화체육관)도 사라지고 사람도 유명을 달리한 40년 세월이 참 야속하다. 김건영 PD와 직접 통화했다. “왜 라디오에서 이런 행사를 주최했는지요.” “당시 TV 코미디가 슬랩스틱 위주여서 말로 웃음을 주는 재주꾼들을 발굴해보자는 게 목표였지.” 정리하자면 이 행사는 눈으로 보는 코미디언의 시대에서 귀로 듣는 개그맨의 시대로 전환하는 징검다리였던 것이다. 입상자들은 ‘폭소기동대’ 같은 라디오 개그프로그램(MC 손창호 임예진)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최양락이 화려한 신고식을 할 때 이경규는 어디 있었는가. 그는 진짜로 기사의 맨 끝줄에 딱 한 번 등장한다. 인기상 이경규(22 동국대 3년). 그 앞에 6명의 입상자 명단이 나오는데 지금도 활동 중인 사람들은 금상 엄용수(지금은 엄영수로 개명), 동상 김보화, 이상운(메기병장) 등이다. 통상적으로 이런 콘테스트에서 인기상은 인기가 있어서 주는 게 아니라 한 명 더 뽑아놓으려고 선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 PD에게 물었다. “이경규는 당시에 어땠는지 기억하시나요.” 40년 전의 8명, 그중 여덟 번째 입상자를 기억해내라니 나도 참 무모하고 무례하다. 김 선배가 웃으며 말한다. “재치가 있었어.” 역시 백전노장답다. 이 말 한마디로 충분하지 않은가.

이경규는 재치로 살아남았다. 사전에 보면 재치는 눈치 빠른 재주 또는 능란한 솜씨나 말씨다. 그는 시청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딱 반 발짝 앞에서 볼 줄 아는 사람이다. 표준말도 아니고 겸양어도 아니지만 그는 40년을 눈치와 재치로 사랑받았다. ‘일밤’의 메인MC였던 주병진 최수종 이문세를 이몽룡에 비유한다면 이경규는 방자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거리감과 거부감이 없었다. 8등으로 시작했지만 지금까지 방송3사(KMS)에서 무려 8번이나 연예대상을 받았다. 1980년대에 데뷔해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에 걸쳐 대상을 받은 유일한 예능인이다. 그는 자신의 전공과 취미를 작품의 소재로 삼은 생활예능인이다. 이를테면 공인 4단인 쿵후는 영화 ‘복수혈전’으로, 골프는 ‘마이 리틀 텔레비전’으로, 낚시는 ‘도시어부’로, 반려동물 키우기는 ‘개는 훌륭하다’로 연결됐다.

이경규에게서 재치를 빼면 뭐가 남을까. 4년이면 몰라도 40년을 버티려면 그것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만만한 후배에게 야단치는 이미지가 있지만 사실 그에겐 호통도 소통의 한 방편이다. 내가 그에게 가장 많이 물어본 말은 ‘이래도 괜찮을까’였다. 그는 재미의 마지노선을 아는 사람이다. 그가 좋다고 하면 나도 동의했고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의 유행어 중 지금도 기억에 남는 건 식품광고에서 짜장면을 비비며 했던 ‘자연스럽게’(이경규식 발음은 ‘자연즈럽게’)다. 그가 비비는 인생과 코미디에선 지금도 자연스러운 향기가 난다. 아무래도 그의 데뷔 50주년 기념사도 써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주철환 프로듀서 겸 작가

[예능은 패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