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듣는 이 종소리는 나 자신의 일부가 이 세상에서 사라짐을 의미한다. 인간은 아무도 고립되고 독자적인 섬이 아니다. 흙덩이 하나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이 그만큼 작아진다.… 나는 인류의 일부이기에 어느 누구의 죽음에도 그만큼 줄어든다. 그러니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지 알려고 하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 나를 위해 울리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대중에게 친숙한 문장은 마지막 두 문장일 것이다.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이 문장을 인용해 소설 제목을 지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다. 글의 원작자는 영국 성공회 신부이자 시인인 존 던(1572~1631). 20세기 영미권 문인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그는 영국 런던에 페스트가 유행하던 1623년에 이 구절이 들어간 ‘비상시의 기도문’을 썼다. 당시 던은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 수석사제였는데, 자신에게도 병증이 발견되자 병의 진행 과정과 내면세계를 반영한 23편의 글을 기록했다.
복음주의권의 대표 작가이자 영성가인 저자는 4세기 전 인물인 던의 글에서 코로나19 시국을 헤쳐나갈 통찰을 발견한다. 책은 그리스 신화와 폐기된 과학 등 던의 방대한 관심사가 반영된 비상시의 기도문 원문 가운데 병상 중에도 기도와 사색을 멈추지 않은 비결이 드러난 부분만 저자가 추린 것이다.
책에서 던의 글은 ‘비참하다’란 말로 시작된다. 당시 런던은 페스트가 3차례 휩쓸어 인구 3분의 1이 죽고, 3분의 1은 타 지역으로 이주한 상황이었다. 팬데믹의 공포 속에서 살던 이들은 ‘왜 우리에게 이런 고난이 닥쳤는지’를 알기 위해 사제인 그에게 몰려왔다. 전염병을 피하는 대신 교구민 곁을 지키기로 한 던은 매일 오전 4시에 일어나 오후 10시까지 성경을 연구하며 이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려 힘썼다. 그런 그에게 페스트의 징표인 반점이 생긴다. 이제는 던이 하나님에게 묻는다. “양떼가 저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지금 어떻게 저를 쓰러뜨립니까.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인간을 지켜보는 일을 즐깁니까.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입니까.” 분노가 묻어나는 던의 말은 코로나19 시대를 맞아 현대인이 품었던 물음과 유사하다.
던은 시시각각 찾아오는 고통과 죽음을 저주하면서도 성경 인물인 욥과 예레미야, 다윗의 시련을 기억하며 하나님 은총을 간구한다. 의사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염려하고, 전염 위험 때문에 가족과 친지와 떨어져 고립될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에선 코로나19 백신과 자가격리 효과에 대해 고민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겹친다. 두려움에 떨던 던은 하나님의 궁극적 뜻이 징계가 아닌 자비임을 발견하고 이윽고 평안을 되찾는다. “죽음이 분명 징계처럼 느껴져도, 죽음으로 예수와 연합하는 일은 하나님의 자비를 알리는 무엇보다 큰 증거”이기 때문이다.
회복 가능성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그가 남긴 기록들은 삶의 의미를 반추하게 한다. “가난과 부족함이 있어야 감사의 덕을 발휘할 수 있고, 어려운 상황에 몰려야만 인내의 덕을 발휘할 수 있다.” “모든 인류는 같은 저자가 쓴 한 권의 책 속에 산다. 한 사람이 죽을 때는 책에서 한 장이 찢겨나가는 게 아니라 그 장이 더 나은 언어로 번역이 된다.”
“다른 이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을 준비할 교리문답”이라며 타인의 조종(弔鐘) 소리를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의 상징으로 삼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은 그는 결국 역병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다. 저자는 하나님을 향한 의심에서 확신으로, 자기의 아픔에서 타인의 고난을 바라보는 던의 의식 변화에서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지점이 적잖다고 본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이나 그 배후에 놓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믿을 수 있는 의사인가.’ 던은 그렇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간 고통의 문제에 천착해 온 저자의 코로나19 해설서다. 코로나19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묻는 대신 기독교적 시각으로 팬데믹의 고통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를 집중적으로 논한다. 코로나19가 가져온 변화와 상실에 의미를 묻는 이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