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를 겪은 지 일 년이 훌쩍 넘었다. 백신이 나오면서 끝이 올 것 같은 희망도 생겼지만 백신의 부작용, 백신 수급의 불안정, 변이 바이러스, 인종혐오의 등장 등 결과를 예측할 수 없게 하는 팬데믹(pandemic)의 그림자는 여전하다. 팬데믹은 그리스어 ‘판데모스(pandemos)’에서 가져온 것으로, ‘모두’를 의미하는 ‘판’과 ‘인구’를 의미하는 ‘데모스’를 합친 말이다. 그러니 ‘팬데믹’이란 ‘모든 사람들이 같은 고통을 겪는 상황’을 이른다.
그런데 이제 그 고통을 벗어나려는 시기에 ‘모든 사람들’은 더 이상 같은 고통 속에 있지 않다. 이미 마스크를 벗은 사람들의 자유, 백신으로 풍요로운 나라들의 희망, 자신들에게 불안한 백신을 다른 개도국들에 넘기겠다는 배려, 다른 누군가에게서 원인을 찾으려는 증오 등이 ‘모두’였던 사람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 ‘모두’의 분열은 아마도 팬데믹을 벗어나고 있다는 징후일 것이다. 그러나 ‘모두’의 고통이 ‘일부’의 고통으로 전이되는 과정이 씁쓸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코로나 이전에도 불평등과 차별, 자국 중심적 이해타산 등은 늘 존재했다. 모두가 같은 희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논리이고 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한 변화 속에서 팬데믹 이후의 바뀐 삶이 ‘모두’에게 희망이 되려면 팬데믹이 가속화시킬 불평등과 차별의 그림자를 지울 방법도 백신개발만큼이나 절실하다. 그렇지 않으면 코로나19에서 놓여난다고 해도 우리의 삶이 정상적으로 회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두’ 안에는 개개의 것들이 있고, 그 개개의 것들은 또한 여러 다양한 그룹들로 묶여있다. 그것이 개인이든 나라이든, 그 다양한 공동체들의 관계를 조절하는 데 작용하는 것이 ‘사이’의 정치학이다. ‘사이’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과 목적, 욕망은 불평등과 균형을 만들어 내는 하나의 요소이다. ‘사이’는 공간적으로는 ‘거리’, 시간적으로는 ‘동안’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이’의 정치학에서는 관계적 의미가 중요하며 이때 ‘사이’는 개체들의 관계를 의미하는 ‘인터(inter)’와 그 개체들이 모여서 이루는 한정된 범위를 의미하는 ‘인트라(intra)’로 구분된다.
‘인터’는 ‘between’의 뜻으로 어떤 것과 다른 것의 관계, 상호성을 의미한다. ‘인트라’는 ‘within’의 뜻으로 어떤 것의 일정한 범위, 내부 환경을 의미한다. ‘인터’라는 의미의 ‘사이’에서는 친밀감이 강조된다. ‘나와 너 사이에 뭐 이런 것을…’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는 끈끈함 같은 것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트라’라는 의미의 ‘사이’에서는 ‘우리’ 밖에 있는 사람들과의 단절이 강조된다. ‘우리 사이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와 같이 ‘사이’는 ‘우리’와 ‘남’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사이’의 이런 이중적 특성 때문에 ‘나와 너의 좋은 사이’는 종종 ‘우리끼리’라는 배타성으로 나아간다.
팬데믹의 고통이 모두에게서 한꺼번에 사라질 수 없는 상황에도 이 ‘사이’의 이중성이 작용한다. 끊임없이 ‘인트라’의 범위를 정하고 밖의 사람들과 안의 사람들을 나누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이’의 가장 좋은 용법은 ‘너와 나’의 관계(인터)를 지속적으로 확장시키며, 그렇게 만들어지는 ‘우리’(인트라)라는 배타성을 넘어서 또 다른 ‘인터’의 고리들을 만드는 것이다. 그럴 때 불평등과 증오는 완화되며, 일부의 희망은 모두의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다. 코로나가 ‘모두’를 고통으로 묶을 때, ‘사이’의 틈 속에서 자란 서로 다른 욕망의 폐해가 코로나 이후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려면 이제 ‘우리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확대해야 할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모두’ 안에 있는 다양한 ‘사이’들이 하나로 연결되는 세상은 물론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사이’ 좋게 지낼 수 있는 세상을 꿈도 꾸지 못한다면 누군가에게 너무 늦게 찾아온 희망은 희망이 아닐 수 있을 것이다.
김호경 서울장로회신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