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성경과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지성과 영성, 행동으로 보여 준 42인을 선정해 이들의 생애와 기독교적 정체성을 각 분야 전문가가 전기 형태로 집필한 소논문 모음집이다. 쉬운 책이 아니다. 방대한 분량에서나 내용의 깊이에서나, 저자와 대상 인물군의 다채로움에서나 활용된 학문 분과의 다양성에서나 여러모로 어려운 책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 얻은 유익이 참 컸다.
첫째, 시공간의 포괄성이다. 구약성경이 신약성경과 언약적으로 통일돼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구약을 폐기한 이들은 교회사 속에서 모두 이단으로 규정됐다. 책은 두 언약의 통일성을 인정하는 보편교회의 전통을 따라 오실 그리스도를 믿고 예비한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과 예레미야를 그리스도인의 범주에 둔다.
이어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와 유다에 이어 사도 바울을 신약의 대표로 삼아 이들의 정체성을 들려준다. 그다음은 초기교회와 중세시대, 종교개혁 시대와 근대 세계, 20세기 그리스도인을 6~9명씩 꼽아 이들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해설한다.
둘째, 선정된 인물의 다양성이다. 이들의 전통·성·국적·시기별 포괄성이 인상적이다. 예컨대 3부 초기교회에 등장한 9인 중 7인은 그리스계 교부 4인, 라틴계 교부 3인으로 고대교회사 구분 기준을 반영했다. 여기에 사도 시대부터 페르시아 등 동방으로 이동한 ‘핍박받는 소수자’의 사례도 둘이나 다룬다.
중세 시대에도 아퀴나스와 단테처럼 유명 그리스도인이 있지만, 노리치의 줄리언 등 여성 수도자나 칼레루에가의 도미니쿠스같이 중세 전공자가 아니고는 알기 어려운 이들도 포함돼 있다.
종교개혁 시대에 할당된 인물군도 흥미롭다. 루터와 칼뱅 외에도 종교개혁 운동에 반기를 들고 국가와 교회의 일체성이라는 대의에 충성했던 토머스 모어나 당시에는 유명했으나 오늘날엔 생소한 대중 경건 작가 토머스 베컨도 등장한다.
근대 시기를 다루는 6부에선 안나 마리아 판 스휘르만과 잔느 귀용 부인 등 여성이 전체 인물의 절반을 차지한다. 존 버니언과 찰스 웨슬리 같은 영어권 인물이 주로 다뤄지나 체코인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와 프랑스인 블레즈 파스칼도 소개된다.
7부 ‘격동의 20세기’에 기독교 철학과 신학으로 근대에 통찰을 제공한 쇠렌 키르케고르와 카를 바르트, CS 루이스와 자크 엘륄이 소개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미국 남부 문화 속에서 가톨릭 신앙을 유지했던 여성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가 포함된 건 특별하다.
책 마지막 42장의 주인공이 ‘아프리카 그리스도인, 혹은 기독교 아프리카인’인 것도 의미가 크다. 21세기 이후 기독교의 미래가 서양의 백인 그리스도인이 아닌 비서양 지역 그리스도인에게 달려 있다는 현실을 독자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