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날 보호 못해”… 美 총기사건 터지면 총기 구매 급증

입력 2021-06-05 04:03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나는 집에 총기가 있는 것이 두렵다. 하지만 경찰이 나를 보호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대니얼 킹 미국 블랙코커스 재단 보건정책 연구원은 워싱턴포스트(WP)에 처음 총기를 구입했던 소회를 이 같이 밝혔다.

미국 전역에서 연일 총격 사건이 발생해 공분이 일고 있지만 도리어 총기 의존증이 강화되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총격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민주당은 총기 없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호소하지만 총기 사고 후 사회불안이 가중되면서 오히려 자위 목적의 총기 수요 증가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공화당과 전미총기협회(NRA)의 완강한 태도는 총기 규제 법안 도입을 방해하고 있다.

총격 사건 후 총기 판매 증가

시민들을 충격에 빠뜨리는 흉악 범죄 사건 뒤에는 총기 수요가 증가한다. 뉴욕타임즈(NYT)는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미 연방수사국(FBI)의 자료를 분석해 총격 사건 뒤에 오히려 총기 판매가 급증했다고 분석했다. 총격 사건 후 발생하는 치안에 대한 불안감이 자위 목적의 총기 구매 심리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지난 4월에는 FBI마저 ‘도망치고, 숨고, 싸워라’는 ‘생존수칙’을 게재했다.

이렇다 보니 총격 사건 후 총기 규제를 외치는 민주당 지지층마저 자기 방어를 위해 총기를 구매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총기 판매점을 운영하는 마이클 카길은 지난해 10월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와의 인터뷰에서 “보통 보수적인 사람들이 주 고객이지만 최근에는 정치적 스펙트럼의 왼쪽에 있는 고객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사회불안 부른 코로나19·인종차별 시위

지난해 미국의 총기 판매량은 일반적인 증가 패턴을 넘어선 폭발적인 수준을 기록했다. 이러한 폭증의 배경에는 코로나19 팬데믹과 대규모 인종차별 시위가 있다. 코로나19 확산이 본격화한 지난해 3월 총기 판매량은 200만 정이 넘어섰는데, 이는 전달에 비해 60% 증가한 수준이다. 버지니아주 로어노크에서 총기를 파는 토머스 해리스는 “작년 3월쯤부터 장전 방법도 모르는 화이트칼라 고객들이 늘면서 400달러 이상의 비싼 총기를 구입하기 시작했다”며 “그들은 봉쇄 기간 동안 집에 갇혀 있어야 하니 안전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고 소개했다.

지난해 5월 발생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의 영향도 강력했다. 경찰들이 자신들을 보호하지 않는다고 느낀 흑인들이 자위 목적의 총기 구매를 이어간 것이다. 인종차별 항의 시위가 전국에서 격렬하게 일어났던 지난해 6월에는 총기 판매량이 최고치를 경신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국민사격스포츠재단이 총기 소매업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인용해 지난해 상반기 흑인의 총기 구매가 2019년 같은 기간에 비해 58% 급증했다고 밝혔다.

아시아계는 원래 총기와 거리가 먼 집단이었지만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아시아계 증오범죄와 인종차별 철폐 시위에 따른 약탈을 피하기 위해 총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주 포웨이에서 총기를 판매하는 대니얼 제임스는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작년 매장에 처음 방문하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전년에 비해 20% 증가했다”며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총기를 사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주에서 총기 판매점을 운영하는 제리 황도 “그들은 전염병과 폭동으로 인한 약탈 방화에서 벗어나려고 온다”고 전했다.

릴리아나 메이슨 메릴랜드대 정치학과 교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신뢰와 공통된 일상의 붕괴와 사회 변화에 대한 공포가 총기 구매를 촉발했다”고 설명했다.

총기 폭력 증가 속 규제 대책은 요원

미 공영라디오방송 NPR은 지난달 10일 미국에서 올해 들어 매주 평균 10건의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비영리단체 총기폭력저장소(GVA)의 자료를 보면 총기 범죄는 지난해 1년 동안 무려 25% 증가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4월 연이은 총격 사건에 개탄하며 “총기폭력은 전염병”이라고 말하는 등 의회에 총기 규제 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 달라고 강하게 촉구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바이든 대통령의 의지와 달리 총기 규제 강화에 찬성하는 여론은 2년 전보다 감소했다. 미 여론조사 기관 퓨리서치센터가 지난 4월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총기 규제를 현재보다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답한 미국인은 53%에 불과했다. 절반이 넘는 비율이지만 오히려 2019년 조사 결과에 비해 약 8%포인트나 하락한 수치다.

NRA의 존재와 공화당의 강력한 저항도 뛰어넘어야 한다. NRA의 정치적 영향력은 실로 막강하다. 이들은 총기 보유를 강하게 반대하는 후보들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낙선운동을 벌인다. 각종 총기 규제 법안이 번번이 의회 문턱을 넘지 못하는 건 많은 정치인들이 NRA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게다가 100석의 상원 중 50석을 확보하고 있는 공화당을 설득해야 하는 현실도 총기 규제 강화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임송수 기자 songst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