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은 패션이다] “못 생겨서 죄송” 겸손한 풍자… ‘콩나물’ 유행어엔 삶의 애환

입력 2021-06-05 04:07
이주일은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사람이었다. 이주일이 1982년 태양음향주식회사를 통해 발매한 ‘노래 제1집’ 앨범의 커버 사진. 왼쪽 아래 사진은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출마한 이주일의 홍보물. 오른쪽 위는 정계 은퇴 후 SBS ‘이주일의 투나잇쇼’로 방송에 복귀한 이주일. 뉴시스

검색창에 코미디라고 치면 뜻밖에도(실은 어느 정도 예상한 대로) 국회의원과 정치평론가의 말들이 주르륵 뜬다. 최근 일주일 사이에만도 ‘이거 코미디예요’부터 ‘한 편의 코미디’ ‘코미디 같은 이야기’ 등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웃음기 걷어낸 얼굴로 누군가를 노려보면서 질책한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코미디 같다고 하니 이거야말로 ‘코미디 같은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코미디가 무슨 잘못인가. 만약 상대방에게 ‘한 편의 드라마’ ‘드라마 같은 이야기’라고 전달했다면 분위기가 어땠을까. 살기등등하지 않고 화기애애했을 게 틀림없다.

정작 코미디언들은 어떤 기분일까. 나는 평생 근시로 살아왔지만 뉴스화면에 근시안적 태도, 근시안적 처방이라는 글자가 나와도 절대 화나지 않는다. 근시라서 차별하는 게 아니라 근시가 아닌데도 근시처럼 구는 사람들이 무시당하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감싸려는 건 전혀 아니지만 정치인들의 논평도 코미디 자체를 비하하는 게 아니라 어설픈 코미디행태를 질책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무대에서 웃기는 사람은 죄가 없다. 제대로(절대로) 웃기지도 못하면서 무대 밖에서 웃기는 언행을 반복하다 보니 서로 미워하고 미움받는 거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사이비 희극인들이 진짜 코미디언들의 밥그릇을 뺏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사실은 뺏긴 것도 동정받을 일은 아니다. 웬만큼 웃겼다면 개그콘서트도 없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엔 현역 국회의원(이용호)이 개콘(1999-2020)을 부활시키라고 촉구한 일도 있었다. 그렇게 할 일이 없느냐고 따질 일은 못 된다. 그는 보건복지위원회 소속이다. 개그맨들이 생계를 걱정하고 개그 무대를 꿈꿔온 젊은이들이 꿈을 포기해야 하는 절망감을 가진대서야 될 일인가. ‘시청률에 연연하지 말고 공영방송 KBS는 서민에게 웃음을 주는 공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마지막엔 (자신을 포함한 정치인도) 기꺼이 코미디 대상이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개그맨과 지망생들에게 가장 무서운 말은 ‘웃기지 마’ ‘꿈도 꾸지 마’일 것이다. 연출경험자로서 말한다면 시청률에 연연해서 개콘이 없어진 게 아니라 개콘이 재미없어서 시청률이 안 나왔고 그래서 없어진 것이다. 확실히 재미있게 만들 수만 있다면 오늘부터 개그맨들은 배달 오토바이에서 내려도 되고 지망생들은 대학로에서 흘린 비지땀을 여의도와 상암동에서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그들은 코미디를 사랑하고 무엇보다 관객, 시청자에게 행복을 주고 싶은 사람들이다. 코미디PD도 마찬가지다.

“왜 드라마는 안 하세요?” 입사 초기만 해도 이런 당혹스러운 질문을 받곤 했다. 지금 같으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추신수 선수에게 ‘왜 축구는 안 하세요’라고 한 번 물어보시죠.” PD에게도 각자의 취향이 있고 적성이 있다. 물론 제작국 내에서 역할 배분도 한몫한다. 내가 입사한 1980년대만 해도 TV의 별칭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안방극장, 하나는 바보상자. 방구석 1열에서 드라마도 보고 영화도 볼 수 있으니 안방극장이라 부른 건 이해가 된다. 그런데 왜 TV를 바보상자라 불렀을까. TV 속에서 바보들이 활개 치기 때문인가, 아니면 TV가 시청자를 바보로 만드는 데 일익을 담당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바보가 되는 줄 알면서도 계속 그걸 바라보는 시청자가 자신을 한심스레 느껴 자조적으로 한 말인가.

살다가 진짜 바보를 만나면 웃음보다 측은함이 들 것이다. 그게 일반적이다. 바보가 아닌 걸 뻔히 아는데 바보처럼 행동하면 신경이 곤두선다. 그 사람이 바보처럼 행동하는 이유가 있을 터이다. 이기적인 목표를 갖고 바보같이 군다면 그건 눈총받아 마땅하다. 이타적인 목적, 즉 누구를 편안하게 해주려고, 당신은 저보다 나은 사람이니 절 보고 마음껏 웃으셔도 좋아요, 이런 의도로 바보 역할을 한다면 그건 박수를 받아도 좋을 일이다.

우리는 착한 사람을 좋게 평가하지만 착한 척하는 사람은 조심하고 경계한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을 선망하지만 잘난 척, 똑똑한 척하는 사람들은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된다. 20세기 여의도에는 국회와 방송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신분증 달고 당당히 들어간 사람도 있지만, 방문증 타서 기웃거리다가 시간을 낭비한 사람도 많았다. 20세기 여의도 삼국지(KMS)에서는 이 두 곳을 비범하게 넘나든 코미디언 한 분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여기에는 나보다 더 코미디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4년 동안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상상만으로는 표현의 한계가 있다. 여기엔 나보다 수영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하려면 적어도 물속에서 자맥질하며 숨을 참아본 경험 정도는 갖춰야 한다.

화면으로 보거나 스튜디오에서 보거나 이주일은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사람이었다. 이 문맥에서 잠시 점검이 필요하다. 보는 순간 이기거나 다투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그에게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나를 무시하지 않았다. 어리바리한 말투와 살짝 풀린 눈으로 그가 카메라 앞에서 말한다. ‘얼굴이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만약에 그가 ‘얼굴이 못생겨서 억울합니다’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코미디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슬기로운 사람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안다. 객관이란 거울 속에 비친 게 아니라 세상에 비친 나의 모습이다. 세상을 의식하며 살라는 게 아니라 자기 뜻대로 살아가되 세상의 시선을 외면하거나 왜곡하지 말라는 얘기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지만 그가 죽은 후에도 세상은 자신을 모르는 사람(못난 사람)과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못된 사람)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못생기면 어때’가 아니고 ‘못생겨서 죄송하다’니 이 얼마나 겸손한 풍자인가.

캐릭터는 유일무이한데 이주일을 흉내 내는 연예인은 부지기수였다. 일반인도 마찬가지였다. 개그맨 오디션에서 절반이 그를 따라 한 적도 있었다. 사실 흉내 내기도 큰 재주이긴 하지만 그건 냉정하게 말해서 개인기다. 기본기 없는 개인기는 바람개비에 불과하다. 바람이 불어주지 않으면 바람개비는 장난감에 불과하다. ‘콩나물 팍팍 무쳤냐’도 콩나물로 끼니를 때운 경험에서 우러난 유행어라고 그는 밝혔다. 콩나물을 어쩌다 먹어본 사람의 개인기와 콩나물에서 삶의 애환을 우려낸 이주일의 인간미를 견줄 순 없다. 이주일 이전에 바보연기의 달인으로 배삼룡이 있었고 이후에 심형래도 있었다. 시청자는 바보연기를 잘하는 사람 이주일(부캐)이 아니라 바보 그 자체의 매력으로 빨아들이는 사람 이주일(본캐)에게 열광했다.

코미디가 세상사의 복사판은 아니지만 축소판 정도는 된다. 좋은 코미디는 시대의 유연성을 가늠하는 거울이자 나침반 역할을 한다. 한국 정치에 유머는 없고 해머(망치)만 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국회의원들의 말은 여전히 폭력적이다. 말뿐인 정치도 문제지만 그 말이 세상을 떠돌며 사람들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은 큰 문제다. 거친 말과 거짓말은 둘 다 세상을 싫증 나게 만든다.

코미디와 정치는 어떤 관계를 유지하는 게 바람직할까. 코미디는 정치에서 웃음의 소재를 찾고 정치는 코미디에서 대중이 무엇을 바라는지를 알아내면 좋을 것이다. 정치가 코미디를 없애려 하고 실제로 없앤 시절도 있었다. 권력자가 웃음거리로 전락한다고 지레짐작해서다. 그러나 길게 보아 소탐대실이었다. 코미디를 탄압하던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나를 마음껏 코미디 소재로 써도 좋다.” 이 말조차도 이상하다. ‘나를 마음껏 드라마 소재로 써도 좋다’고 하는 사람 있었는가. 정치인들은 이 말을 명심하자. 유머가 없는 카리스마는 공포를 안겨줄 뿐이지만 유머가 있는 카리스마는 권위를 얹어준다.

주철환 프로듀서 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