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마태복음 15장을 보면 가나안 여인 이야기가 등장한다. 마가복음은 이 여인을 좀 더 정확하게 ‘수로보니게(시리아-페니키아) 족속’이라 소개한다. 반면 마태는 고대 지명인 가나안 사람으로 이 여인을 칭하면서 독자들에게 구약성경의 배경을 상기시킨다.
구약성경에서 가나안 사람은 이스라엘과 공존할 수 없고, 반드시 진멸시켜야 할 족속이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과 조금의 유익도 나눌 수 없었다. 그러므로 ‘가나안 여인’이라는 표현은 유대인과 날카롭게 대비시키는 역할을 한다. 게다가 이 여인에겐 흉악하게 귀신 들린 딸이 있었다. 여인은 유대인이 도무지 가까이할 수 없는 부정한 사람, 저주받은 이방인이었다.
예수께서 그 지역에 오셨다는 소문을 들은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와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그는 혈통-인종적으로 다윗의 자손과 전혀 상관없는 이방 여인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나아왔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외침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나서서 예수님께 이 여인의 문제를 좀 해결해 주셔서 돌려보내시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예수님은 열두 제자의 사역을 그렇게 규정하셨듯이, 당신의 사역 대상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으로 한정하셨다.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예수님께 엎드려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을 완전히 좌절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처럼 재차 말씀하셨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에서 자녀는 이스라엘을, 개는 이방인을 가리킨다. 자녀의 몫을 개에게 던져주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오직 자녀만이 은혜를 입을 자격이 된다는 의미였다.
모멸감을 느낄 말씀이었지만 여인에겐 물러섬이 없었다. 오히려 여인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결국 이 말에 예수님은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여인의 결정적 한마디는 하나님으로부터 작은 은혜라도 입을 수 있다면 자녀가 아니라 주인의 개가 되어도 좋다는 의미였다. 여인에게는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직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만이 간절했다. 왜냐하면 하나님 외에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시 70:5) 가나안 여인의 고백은 다윗의 이 고백과 다르지 않았다. 자신에게 아무런 능력도 없고 대안도 없음을 인정할 때, 곧 가난한 심령이 될 때야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된다. 그것이 다름 아닌 큰 믿음이다.
큰 믿음이란 대단한 비전을 품고 큰 사역을 펼치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오롯하고 가난한 심령이다. 예수님은 이 믿음을 칭찬하실 뿐 아니라 약속대로 가난한 심령에게 천국의 몫을 허락하신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 가나안 여인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찾으러 오신 이스라엘의 잃은 양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신앙생활의 모습은 세련되어진 것 같지만 정작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과 절박함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에겐 하나님 외에도 대안이 너무나 많고,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부유해져 있다. 가나안 여인과 달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은혜보다는 우리 자신이 어떠한 대우를 받느냐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밖에 답이 없다고 부르짖는, 가난하고 복된 심령을 여전히 찾고 계신다.
(삼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