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끌던 전기차 스타트업, 찬밥 신세… 스팩 거품 꺼지나

입력 2021-06-05 04:05
스팩을 통해 미국 증권 시장에 상장한 5개 전기차 스타트업의 대표 차종 모습.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니콜라의 수소전기트럭 ‘니콜라 원’, 카누의 전기 승합차 ‘카누 밴’, 피스커의 전기 SUV ‘오션’, 어라이벌의 친환경 전기차, 로드스타운 모터스의 전기 픽업트럭 ‘인듀어런스’. 각 사 제공

미국 증권 시장에 스팩(SPAC·기업인수목적회사)을 통한 데뷔로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전기차 스타트업들이 최근 주가 하락으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스팩이란 인수·합병(M&A)만을 목적으로 하는 일종의 페이퍼컴퍼니를 말한다. 스팩은 설립 단계부터 유망 기업을 인수하는 것을 조건으로 다수의 개인과 기관투자가로부터 공개적으로 투자자금을 모은다. 투자자금이 마련되면 스팩은 거래소에 상장되고, 스팩의 경영진은 상장 후 3년 이내에 대상 기업을 찾아내 인수를 성사시켜야 한다. 이때 유망한 비상장 기업이 발굴되면 해당 기업 가치 증대로 투자자들은 주식을 팔아 수익을 얻지만 인수에 실패하면 공모자금은 그대로 반환된다.

4일 블룸버그통신과 인베스팅닷컴 등에 따르면 미 전기차 유망 기업인 니콜라, 피스커, 로드스타운 모터스, 카누, 어라이벌 등 5개 스타트업은 스팩과 M&A를 통해 증권 시장에 상장했으나 최근 휘청이고 있다. 시가총액 최고치를 합하면 600억 달러(66조5000억원)에 달할 정도로 기대를 모았지만 지난달 말 이들 가치는 최고점에서 400억 달러(44조3400억원) 이상 증발했다.


니콜라는 ‘제2의 테슬라’로 불리며 전기차 스타트업의 유망주로 불리던 업체다. 지난해 6월 나스닥 상장 당시 니콜라 주가는 거대 완성차 업체인 포드와 견줄 만한 290억 달러 수준이었다. 여기에 니콜라는 같은 해 9월 전기 픽업트럭과 대형 트럭 생산을 위해 제너럴모터스(GM)와 손잡는다는 깜짝 발표까지 내놨다. 대형주인 GM의 주가는 10% 올랐고, 니콜라 주가는 50% 뛰었다.

하지만 불과 이틀 뒤 시장조사업체인 힌덴버그 리서치가 충격적인 보고서를 내놓으면서 ‘3개월 천하’는 마무리됐다. 니콜라가 상장 전부터 실적을 부풀리는 사기극을 벌여왔고 각종 보유 기술은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규제 당국은 즉각 니콜라에 대한 실사에 들어갔다. 창업자인 트레버 밀턴은 자리에서 물러나며 보유 주식을 대량 매각했고, GM은 지분 투자 계획을 철회했다. 상장 당시 90달러 수준이었던 주가는 1년도 되지 않아 10달러 선으로 내려앉았다.

피스커 역시 니콜라가 상장한 지 한 달 만에 스팩과 합병 소식을 발표한 전기차 스타트업이다. 피스커는 자체 자동차 생산을 시작한 지 2년이 넘은 회사였다. 하지만 4만 달러 이하의 SUV 차량을 특화해 시장에 출시하고, 자동차 제조를 외주화하려는 핵심 계획이 모두 무산됐다. 피스커의 기업 가치는 지난 2월 80억 달러로 정점을 찍었지만 지난달 30억 달러 선으로 떨어졌다.

전기 픽업트럭을 생산하는 스타트업 로드스타운 모터스는 지난해 10월 스팩을 통해 나스닥에 상장했다. 로드스타운은 상장 첫날 20%에 가까운 급등세를 보이며 전기차 업계의 또 다른 다크호스로 등극했다. 마이크 펜스 당시 미 부통령이 같은 해 6월 로드스타운이 GM으로부터 인수한 공장에서 대표 모델 ‘인듀어런스’가 생산되는 것을 참관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하지만 인듀어런스가 지난 1월 테스트 주행에서 알 수 없는 원인의 화재로 전소되면서 주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힌덴버그 리서치는 “투자자를 오도했다”며 로드스타운을 맹비난했고, 이후 미 증권거래위원회(SEC)는 기업 조사에 착수했다. 기업 가치는 지난달 말 기준 불과 3개월 전과 비교해 25%에도 못 미치는 12억 달러에 머물고 있다.

전기 승합차를 만드는 카누도 지난해 말 나스닥에 상장했다. 상장 직전인 2019년 말 7인승 밴을 공개하면서 현대자동차그룹과 전기차 개발 계약을 맺기도 했다. 지난 1월에는 애플카와 협업한다는 소문까지 돌면서 기대감이 고조됐다. 하지만 지난 3월 카누는 구독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기존 경영 계획과 크게 배치되는 결단을 내리면서 최고재무책임자(CFO)를 포함한 경영진이 잇따라 교체되는 혼란을 겪고 있다. SEC는 카누의 지난해 재무보고서에서 취약점을 발견하고 조사에 들어갔다.

지난 3월 스팩과 합병으로 나스닥에 상장한 어라이벌은 당시 기업 가치가 130억 달러에 달했다. 전기 밴과 버스에 특화된 이 회사는 합병 이전에도 현대자동차그룹과 블랙록 등 유명 후원자를 끌어모았다. 하지만 첫 기세와 달리 최근 평가액은 105억 달러로 뚜렷한 반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미래 산업으로 유망한 전기차 시장에 스타트업들이 스팩에 몰리는 이면에는 각종 절차가 까다로운 IPO(기업공개)보다 수월하게 자금을 모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자리한다. 합병에 성공하면 제도권 내 증권 시장 상장까지 이어질 수 있다. 올해만 벌써 미국에서는 300개 이상의 스팩을 통해 상장한 업체들이 1000억 달러를 넘게 모집하는 등 갈수록 스팩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다.

하지만 미 정부는 스팩 시장이 스타트업계를 중심으로 과열되고 있다고 우려한다. 전기차 스타트업 사례처럼 시장에서 투명하게 평가받은 공인된 업체들이 아닌 데도 광적으로 차익을 노린 투기 자본이 몰리고 있어서다. 최근 규제 당국이 스팩 상장 기업의 회계 규정 적용방식을 까다롭게 변경하겠다는 가능성을 시사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풀이된다.

최지웅 기자 wo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