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까 두렵네요. 더욱 열심히 북한 선교, 탈북자들을 정성껏 보살피라는 의미로 상을 주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청라사랑의교회 박용배 목사는 지난달 20일 제10회 국민미션어워드 ‘올해의 크리스천 리더’상을 수상한 뒤 “감사드린다”며 이렇게 말했다.
박 목사의 북한 선교에 대한 관심은 탈북자와 함께 예배를 드린 것이 계기가 됐다.
“1995년 중국으로 넘어온 탈북자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을 알게 됐습니다. 신분증이 없어 언제 북한으로 끌려갈지 모르는 분들이 많아요. 한국을 비롯한 자유 세계로 데려가 달라는 요청이 많았습니다. 안타까운 사연이 많습니다. 탈북자와 북한에 대한 기도와 관심이 절실합니다.”
이후 그는 탈북자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급히 달려간다. 몸이 아픈 탈북자의 병원 수술비를 댄다. 그동안 탈북자 500여명을 구출했다. 이 중엔 인신매매를 당했다가 구출된 탈북자들도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신학을 공부해 다른 탈북자를 그리스도의 제자 삼는 사역을 담당하고 있다.
북한 선교에 관심을 가진 탈북자 20여명을 신학교에 보내 목회자로 만들었다.
북·중 국경 지역에서 북한 지하교회의 성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성경책을 갖고 있다가 붙잡히면 죽는 줄 알면서도 생명을 걸고 믿음을 지키는 참 신앙인이었다. 탈북자 중에는 중국 조선족 신분증을 갖고 북한을 드나들며 지하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도 있었다.
그의 목표는 탈북 목회자 100명을 세우는 것이다. 북한 땅에 문이 열렸을 때 100곳 이상 교회를 세우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교인들은 탈북자들을 돕고 북한의 각 시·군에 교회를 설립하겠다고 작정하고 헌금하고 있다.
“지금도 저는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북·중 국경지대를 비롯 국내외 곳곳을 누비고 있습니다. 과거에 세계를 품는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만큼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알고부터 세계를 향해 날아오르기 시작했고 복음을 들은 제자들이 또다시 세계를 향해 도약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복음의 위대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다. 주린 배를 움켜쥐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 겨우 초등학교를 마쳤다. 이후 객지에 나와 중국집 배달부와 만두집, 레스토랑, 맥주집 종업원을 전전했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만 세 살이 되던 해 이른 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산에 나물을 채취하러 갔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머리를 심하게 다쳤고 병원 이송 중 숨을 거두었다.
가세가 날이 갈수록 기울었다. 아버지가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어느 날 이웃 사람들이 갑자기 집에 들이닥치더니 가구며 가재도구, 가마솥까지 가져갔다. 그리고 얼마 뒤 그나마 있던 집까지 빼앗기면서 조그마한 초가집으로 이사를 해야만 했다.
아버지와 세 명의 형은 모두 알코올 중독자로 살다가 사망했다. 술이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이런 다짐이 어릴 때부터 교회로 이끌며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게 만들었다.
“어릴 때 교회 옆집에서 자랐고 자연스레 교회는 놀이터가 됐습니다. 여름성경학교나 성탄절이 되면 노래도 부르고 연극도 할 수 있는 교회에 가는 것이 즐거웠어요. 교회에서 내민 따뜻한 손길을 아직 잊을 수 없습니다. 교회 전도사님 댁 사모님은 가끔 식량을 주고 가셨어요. 저희 가족이 부끄러워 할까봐 다른 성도들이 알지 못하게 몰래 선행을 베푸신 것이지요.”
하루 종일 식당 일을 하면서도 새벽기도회에 나가 세속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평생 자신을 온전히 지켜주실 분임을 알게 됐다. 하나님은 그를 훈련시키면서 치유하셨고 다듬어 주셨다.
군 복무를 마치고 24세 때 과수원집 무남독녀 외동딸과 결혼했다. 하지만 또다시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이 닥쳤다. 신부가 신혼 첫날부터 미래가 불투명한 자신과 결혼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버틴 것이다. 몇 달을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낙심이 컸다. 농약을 먹고 생을 마감하려는 순간 장모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장모는 “목회자가 됐으면 한다”고 권했다. 일주일 금식 기도 끝에 신학교에 가라는 응답을 받았고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됐다.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계명대와 총신대 신학대학원(사당동)을 1991년 2월 졸업했다. 인천 부평 부개동 빈민촌에 교회를 개척했다. 소외계층에 라면, 연탄 등을 전달하는 구호 활동과 빈민선교를 했다. 그러다 아내가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무릎 꿇고 기도했다. 그러길 며칠, “은과 금을 주지 말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라”는 응답을 받으면서 비로소 전도자로 거듭났다.
그는 복음만 전하기로 결단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복음을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복음 전도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과천정부종합청사 직원, 신문사와 방송국 신우회 직원들의 신앙을 상담하고 열심히 설교말씀을 전했다. 청와대 및 TV 연기자 신우회에서도 예배와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받는 언론인이 잇따랐다. 그는 40여개국 50여개 도시를 다니며 세미나를 인도하는 강사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그런 그에게 교회성장의 축복을 주셨다. 인천 청라국제도시에 예배당을 세웠다. 또 송도국제도시에 지교회를 세워 목회 중이다. 이런 교회 성장을 바탕으로 미자립교회 목회자 초청 무료 전도세미나를 열고 있다. 세미나에서 영성훈련을 통해 교회 성장을 돕고 있다.
“저의 또다른 기도 제목은 개척 교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어려운 교회 목회자와 사모님들을 영적 훈련을 통해 미자립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입니다. 제가 받은 응답과 축복을 함께 나누고 그분들도 전도와 제자의 응답을 누리도록 도울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난달 23일 인천 남동구 논현동에 탈북자를 위한 논현사랑의교회를 설립했다. 탈북 여성과 중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위한 방과 후 공부방을 운영한다.
유튜브 방송 ‘박용배 TV’도 운영하며 복음 전파와 북한 선교 노하우를 전하고 있다. 저서로 ‘못난이 목사 벼랑 끝에서 날다’ ‘생각의 설계’ ‘운명과 맞짱 뜨기’ 등이 있다. 희망을 노래하는 음반 ‘두 바퀴의 사랑’을 냈다. 다음 달 자신의 간증집 ‘전도는 쉽게 되어지는 것이다. 부제: 못난이 목사의 전도와 북한선교 119’를 출간한다.
그는 하나님의 통일 시간표가 다가오고 있다고 확신한다. 밤이 깊으면 새날이 밝아 오기 마련인 것처럼 북한의 새날도 서서히 밝아오고 있다고 믿는다.
“탈북자를 섬기고 북한 복음화를 위해 열심히 달려갈 것입니다. 코로나19로 힘든 형편에서도 북한 선교에 기도와 관심, 물질로 동참해 주시는 주변 교회 성도님들에게 깊이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저는 지금 행복한 전도자로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누리니까 너무나 행복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지상 최대의 선물입니다. 나눌수록 풍성해지는 것이 복음이 가져다주는 귀한 축복입니다.”
인천=글·사진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