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빌라 세입자 A씨는 지난달 전세 계약을 2년 연장했다. 이사를 갈까 고민도 했지만, 대안을 찾지 못했다. 집주인은 연장하려면 보증금을 5% 인상해 달라고 요구했다. A씨는 기존 전세 보증금(2억2800만원)의 5%에 해당하는 1140만원을 집주인에게 줬다. 집주인이 계좌 이체가 아닌 ‘수표’로 인상분을 달라고 고집해 다소 의아했지만, 부동산에서 집주인의 어머니라는 이를 만나 수표를 전달하고 계약서도 다시 썼다.
하지만 며칠 뒤 A씨는 국민일보 보도(2021년 5월 10일자 1면)를 통해 ‘세 모녀 전세 투기단’을 알게 됐다. 피해자 오픈 채팅방에 접속해 다른 피해자들과 집주인의 이름을 맞춰보니 우려대로 집주인 박민희(가명·29)씨는 세 모녀의 둘째 딸이었고, 수표를 받은 이는 박씨의 어머니 김모(61)씨였다. 피해자들은 채팅방에서 “계좌가 거래 정지됐는지 수표를 요구했다”는 의견을 남겼다.
세 모녀는 보도 이후에도 피해를 인지하지 못한 세입자들에게 계약을 연장하면서 보증금 인상분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만기까지 2년이 남긴 했지만, 무엇부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실제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들 얘기를 들으면 너무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쏟아지는 피해 진술… 경찰 수사 속도
‘세 모녀 전세 투기단’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도 수십건의 피해자 진술을 토대로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 경찰은 세 모녀가 조직적으로 500채가 넘는 투기에 이른 경위와 건축주나 공인중개사 등 다른 공모 관계가 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다만 세 모녀는 사기 혐의를 부인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 관악구의 한 빌라 세입자 B씨도 뒤늦게 피해를 깨닫고 최근 경찰에 피해 사실을 진술했다. B씨는 2년 전 건축주와 전세 계약을 했는데, 한 달 뒤 집주인이 세 모녀 중 첫째 박현주(가명·32)씨로 바뀌었다. 당시 박씨의 어머니인 김씨를 만나 전세 계약서를 새로 작성했다. 그런데 지난해 6월 전세 계약 만기를 앞두고 김씨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B씨는 “너무 연락이 안 돼서 심지어 집주인이 죽은 줄 알았을 정도였다”고 토로했다.
B씨는 보증금 반환 소송에서 승소 후 경매를 진행하고 있다. B씨는 “원래는 보증금만 회수하려고 했는데, 500채 규모의 대규모 피해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형사 처벌이 필요하다는 확신이 들어 자발적으로 경찰에 출석해 진술했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집주인인 세 모녀는 물론이고 건축주와 공인중개사들이 같이 공모했을 것이라고 강하게 의심한다. 한 피해자는 “이번 기회에 건축주, 공인중개사, 분양사, 다주택 임대사업자로 이어지는 ‘보증금 사기 생태계’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비슷한 사건에서 집주인과 공인중개사가 공범으로 밝혀진 경우도 있었다. 2019년 서울 강서구 화곡동 일대에서 벌어진 수십건의 전세보증금 미반환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임대사업자였던 집주인 강모(53)씨와 함께 공인중개사 조모씨도 사기 혐의로 함께 입건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경찰은 둘 사이의 자금 흐름을 파악해 리베이트가 있었음을 밝혀냈다.
‘서민들의 보증금’이 위험하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 같은 전세보증금 피해가 주로 3억원 이하의 보증금에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보증금 규모가 상대적으로 적은 만큼 피해자 대부분은 사회 초년생이나 신혼부부 등 사회 취약 계층일 수밖에 없다. 수도권 아파트 가격 상승으로 정치권이 집값 잡기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지만, 정작 3억원 이하인 ‘서민들의 보증금’은 외면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병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주택도시보증공사로부터 받은 보증금 미반환 사고 세부 내역을 보면 2013년부터 2021년 4월까지 신고된 5279건의 보증금 미반환 사고 중 4703건(89.1%)이 보증금 3억원 이하였다. 소 의원은 보증금 3억원 이하 임차주택의 경우 보증금반환보증보험 가입을 의무화하고 보증수수료를 임대인과 임차인이 나눠 내는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 발의를 추진 중이다. 지난 20대 국회에서 자유한국당 소속 김현아 의원이 발의한 법안과도 취지가 비슷하다.
소 의원실 관계자는 “전세 사기 문제는 임대사업자나 전월세신고제 등 제도 문제, 법적 처벌 등 형사적 문제, 보상과 같은 민사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풀기가 쉽지 않다”며 “민생 문제인 만큼 여야가 함께 입법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판 기자 p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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