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보드는 멀고 ‘길보드’는 가까웠다. 오래도록 선망했지만 빌보드는 길보드를 품어주지 않았다. 이윽고 세상은 바뀌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SNS)에 능수능란한 음악천재들이 마침내 길거리 불법리어카를 ‘다이너마이트’로 부수고 신세계를 ‘버터’ 향기로 장식했다.
방탄소년단은 이른바 유튜브 시대의 비틀스로 불린다. 유튜브의 슬로건은 ‘널리 널 알려라’(Broadcast Yourself)다. 벽을 넘어야 별이 되듯이 자신을 세계에 알리려면 어둠에 맞설 준비가 돼야 한다. 먼저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 첫 번째 필수조건은 자신을 존재 그 자체로 사랑하는 일이다. 방탄의 메시지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가. ‘널 사랑해라.’(Love Yourself)
사랑을 전달하려면 꿈을 향해 이동할 수 있는 바퀴가 필요하다. 음악에도 바퀴가 있다.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는 김광석의 번안가요(1995)다. 가사 속엔 ‘네 바퀴로 가는 자전거’ ‘물속으로 나는 비행기’도 등장한다. 겉만 보면 공상과학의 세계 같지만 속을 보면 현실풍자의 노래다. 원곡은 밥 딜런의 ‘두 번 생각하지 마. 그걸로 족해’(1963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다.
예능에도 바퀴가 있다. ‘바퀴 달린 집’(tvN) 이전엔 ‘세 바퀴’(MBC)가 있었다. 종영(2015)한 지 꽤 됐는데 부활한 건 순전히 멕시코에서 온 청년 덕분이다. 그는 ‘세 바퀴’를 인터넷에서 접한 후 머나먼 나라 한국에 관심을 가졌고 지금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멕시코사람이 됐다. 원래 ‘세 바퀴’는 ‘세상을 바꾸는 퀴즈’를 줄인 제목인데 덤으로 한 청년의 운명을 바꾸는 프로가 된 것이다. 열아홉 살 청년은 꿈을 이루기 위해 독학으로 한국어를 익히고 여비를 마련하고자 한국기업이 인수한 멕시코 구리광산에서 한국직원의 통역사로 일했다. 나중에 그가 ‘복면가왕’(MBC)에 홍합 가면을 쓰고 출연했을 때 부른 노래가 조덕배의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이었다. ‘다가가면 뒤돌아 뛰어가고/ 쳐다보면 하늘만 바라보고’ 비록 1회전에서 탈락했지만, 그는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맘에 들어온 그대를 버리지 않고 꾸준히 성장시켜 마침내 일을 저지르고 만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김현철의 ‘왜 그래’ 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멕시코에서 온 크리스티안 부르고스는 보컬 서바이벌 ‘보이스킹’(MBN)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이 노래를 한국어와 스페인어로 불러 946점을 받았다. 데스매치에서 의문의 1패(?)를 당한 건 ‘론리 나잇’(Lonely Night)을 열창한 고유진(플라워)이다. 데뷔 23년 차 록발라드 가수에게 ‘외로운 밤’을 선사한 크리스티안은 이제 우승 고지를 향해 진격 중이다.
몇 번 인사를 나눈 적 있는 크리스티안 측에서 어느 날 내게 매력 있는 제안을 했다. “선생님도 이 친구도 음악을 좋아하니까 함께 유튜브를 해보는 건 어떨까요.” 용의주도하게도 이름까지 정해놓았다. 내 이름 첫 글자 ‘주’와 크리스티안의 첫 글자 ‘크’를 따서 ‘주크박스’였다. 정중한 답변을 전달했다. “주크박스에 음악을 좀 더 채운 후에 다시 얘기하시죠.”
라디오 ‘별밤’에서 디제이 이문세가 읽어준 사연이 기억난다. 멕시코여행을 다녀온 사람이 보낸 엽서다. 사막을 걷다가 허기에 지쳐서 식당에 들어갔다. 메뉴를 보여주는데 모르는 글자 일색이다. 제일 가격이 비싼 음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종업원이 놀라는 기색이다. “나 돈 있어” 하는 표정을 지으며 타코 나초 같은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데 한참 후에 나타난 건 멕시코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악단이었다. 그들은 약 30분간 손님 앞에서 축하공연을 하고 판초를 휘날리며 유유히 퇴장했다. “배고파 죽겠는데 이게 뭐지.” 그 식당에서 최고의 메뉴는 음식이 아니라 음악이었던 거다.
이어지는 라디오 사연은 배경이 한국전통시장이다. 외국인 둘이 옷가게에 들어와 영어로 가격을 묻는다. 주인이 종업원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비싸게 불러.” 외국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또박또박 한국어로 대응한다. “그러시면 곤란하죠.”
보는 이에겐 점입가경이지만 느끼는 이에겐 격세지감이다. ‘슈퍼맨이 돌아왔다’(KBS2TV)에선 뉴질랜드에서 태어나고 호주에서 자란 샘 해밍턴이 매주 일거수일투족을 공개한다. 옆집 자녀 이름은 몰라도 샘의 두 아들 윌리엄과 벤틀리의 이름은 친숙한 시청자가 많다. 이뿐인가. ‘이웃집 찰스’(KBS1TV)에는 화요일마다 세계 각국의 이방인들이 7년째 등장한다. 출연을 기다리는 외국인들이 줄 서서 대기 중이라고 들었다. 세상은 달라졌다. 이제 세계시민들은 확실한 이웃이 된 것이다.
방송작가 유호가 쓴 드라마 ‘파란 눈의 며느리’(1968·TBC)에 미국 유타 출신의 케이시가 주연을 맡을 때만 해도 출연자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다. 그때만 해도 외국인이 더듬더듬 한국어를 해도 신기하게 보던 시절이다. 인식도 지금과는 달랐다. 드라마 속 할아버지는 외국인 약혼녀와 함께 귀국한 손자를 집안에 들이지 않는다.
정부에서 외국어 이름을 못 쓰게 막던 시절도 있었다. 펄시스터즈는 진주자매로, 바니걸스는 토끼소녀로, 어니언스는 양파들로 이름을 바꿨다. 지금은 어떤가. 트로트를 구성지게 부르는 마리아는 미국 코네티컷 출신이다. 외국인이 한국어로 수다를 떤다? 나아가 외국인들끼리 토론을 한다? 도대체 이건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백상예술대상은 예능 부문에서 2007년에 ‘미녀들의 수다’(KBS2TV), 2015년에 ‘비정상회담’(JTBC)을 선택했다. 개성을 뽐내고 입담을 과시할 줄 아는 외국인들은 이제 종횡무진 TV를 휘젓고 다닌다.
이탈리아에서 온 크리스티나 콘팔로니에리는 특유의 하이톤으로 ‘아이고’ ‘세상에’를 적재적소적시에 구사하며 인기를 누렸다. 개그맨들이 그의 성대모사를 할 정도라면 말 다 했다. 사실 속도와 억양으로 눈길을 끈 주한 외국인의 원조는 이다도시다. 노르망디상륙작전으로 유명한 프랑스 북부 페캉 출신인 그는 ‘봉주르 와인’ 등 책을 5권이나 낸 현직 대학교수다. ‘이다도시의 행복공감’이라는 책에서 스스로를 ‘멜랑콜리한 여자’로 평했다.
‘비정상회담’의 이탈리아 대표 알베르토 몬디는 외국 자동차회사의 한국지사 직원 신분으로 출연해 이목을 끌었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이탈리아어까지 무려 4개 국어에 능통한 거로도 유명하다. 캐나다 대표 기욤 패트리는 ‘스타크래프트’ 1세대 프로게이머, 중국 대표 장위안은 북경TV 아나운서 출신이다. 외국어학원에서 중국어 강사를 하는 투잡맨이기도 하다. 다재다능하기로는 벨기에 대표 줄리안 퀸타르트를 빼놓을 수 없다. 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KBS2TV)에서 레이프 가렛 역을 맡아 연기자로도 주목받았다. 프랑스 대표 로빈 데이아나는 비보이 댄서 출신이다. 화보 및 광고모델로 인상을 남겼다. 타일러 라쉬는 미국 시카고 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석사과정을 이수하며 스마트한 이미지로 주목을 받았다. ‘문제적 남자’(tvN)에 출연하며 이른바 뇌섹남의 면모를 과시했다. 점잖은 이미지의 독일 출신 방송인 다니엘 린데만은 아나운서와 소개팅하는 프로그램에까지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페이스북에서 루마니아 여학생과 친구인데 제 작품을 다 봤대요.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려고 했는데 한국에서 공부할 거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만든 드라마가 92개국에서 방송되다니. 세상에 어떻게 이런 영광이….” ‘대장금’을 연출한 이병훈PD가 한 말이다. 이분에게 제안하고 싶은 소재가 있다. 바로 네덜란드 사람 하멜 이야기다. ‘하멜표류기’엔 적어도 36명의 외국인이 필요하다. 사극의 달인이 외국인 주인공 오디션하는 현장을 유튜브로 중계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장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