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와 별주부 자라의 이야기인 ‘수궁가’는 판소리 다섯 바탕 가운데 유일하게 우화적인 작품이다.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등 다른 네 바탕에 비교해 비장미는 덜하지만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이 넘친다. 그동안 아동용으로 각색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그 소리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하지만 이날치가 등장하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이날치는 영화 ‘타짜’ ‘곡성’ ‘부산행’ 등의 음악감독이자 밴드 어어부프로젝트와 씽씽에서 활약한 베이시스트 장영규를 주축으로 베이스 2명, 드럼 1명, 소리꾼 4명으로 이뤄진 밴드다. 2019년 초 결성돼 홍대 클럽 등에서 공연하며 입소문을 타던 이날치는 그해 9월 네이버 문화재단의 유튜브 채널 온스테이지에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와 함께 선보인 ‘범 내려온다’ 영상으로 젊은 층의 관심을 끌었다. 이어 12월 발매된 싱글 앨범을 시작으로 6개월간 매달 곡을 발표한 뒤 지난해 5월 말 정규 1집 ‘수궁가’를 발매했다. 퓨전 국악이라도 판소리가 기본인 음반 가운데 이날치의 수궁가만큼 주목받은 것은 없었다.
지난해 8월 한국관광공사가 만든 해외 홍보 영상 ‘필 더 리듬 오브 코리아’(Feel the Rhythm of KOREA)는 수궁가 열풍을 폭발시켰다. 전국의 관광 명소를 배경으로 이날치의 가락에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안무가 더해진 영상은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날치의 수궁가는 다양한 광고에도 사용됐다.
이날치가 일으킨 수궁가 열풍은 공연계 전반으로 확대됐다. 지난해에는 완창 판소리 무대 등 국악계에서 유난히 수궁가를 자주 볼 수 있었다. 그 배경으론 김수연 명창이 지난해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 보유자로 최종 결정된 것도 있지만, 수궁가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늘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김수연은 명창 박초월(1917~1983)의 호를 딴 미산제 수궁가를 잇고 있다.
올해는 국립창극단이 수궁가 열풍에 기름을 부었다. 국립창극단이 지난달 17~18일 선보인 ‘절창’과 다음 달 2~6일 무대에 올리는 ‘귀토’ 모두 수궁가가 원작이다. ‘절창’은 젊은 소리꾼 김준수와 유태평양이 수궁가를 입체창(역할을 나누는 데서 나아가 장단에 맞춰 가사를 주고받는 방식)으로 선보인 것이다. ‘귀토’는 수궁가 가운데 토끼가 육지에서 겪는 갖은 고난과 재앙인 삼재팔난에 주목해 고선웅과 한승석이 새롭게 창극화했다.
국립창극단은 근래 수궁가 열풍 때문에 ‘절창’과 ‘귀토’를 기획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실제로 ‘귀토’는 지난해 7월 2020~2021시즌 레퍼토리 발표 때부터 포함된 것으로 유수정 예술감독은 “코로나19라는 어려운 시기에 관객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생각하다가 수궁가를 떠올렸다”고 밝혔다. 완창 판소리 무대의 연장선에 있는 ‘절창’은 당초 젊은 소리꾼들이 자신 있는 판소리 대목으로 자웅을 겨룬다는 콘셉트였는데, 팬덤을 거느린 김준수와 유태평양이 출연하면서 수궁가의 입체창이 결정됐다. 두 사람 모두 미산제 수궁가를 배웠다는 점이 큰 역할을 했다. 다른 바탕의 판소리는 두 소리꾼이 다른 스승에게 배워 유파가 다르기에 입체창을 하기 어렵다.
수궁가 열풍은 다음 달 11~12일 LG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이날치x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수궁가로 정점에 도달할 전망이다. 올해 이날치가 발표한 싱글 ‘여보나리’를 포함해 정규 1집 수궁가 전곡을 라이브로 공연한다. 이날치와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가 앨범 전곡을 함께 공연하는 것은 지난해 6월 LG아트센터 공연 이후 1년 만이다. 올해는 한국의 대표적 설치미술 작가 최정화가 무대미술을 담당해 기대를 모은다.
이처럼 수궁가 열풍을 불러온 이날치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장영규는 앞서 인터뷰 등에서 2018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수궁가를 소재로 만든 음악극 ‘드라곤 킹’ 작업을 한 게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당시 ‘드라곤 킹’의 연출가 양정웅에게 음악을 의뢰받은 장영규는 안무가 안은미의 ‘바리’에서 함께 작업한 소리꾼 안이호를 찾았다. 이후 소리꾼 권송희 이나래 신유진이 합세했다.
애니메이션과 판소리를 결합한 멀티미디어 음악극 ‘드라곤 킹’은 2018년과 2019년 두 차례 공연됐다. 대중적으로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문가들은 음악적인 면에서 호평을 했다. 이 극의 소재가 수궁가로 정해진 것은 2019년 광주에서 열린 세계수영선수권대회와 관련이 있다. 당시 대회 개최를 기념해 국제무대에 선보일 수 있는 한국적 콘텐츠를 기획하면서 판소리 수궁가가 낙점됐다. 수영 대회인 만큼 물이 배경인 수궁가를 무대에 올리자고 한 것은 농담 같은 진담이다.
연출가 양정웅은 “기획 단계에서 극장 관계자들과 여러 논의가 있었는데, 미디어를 활용해 판타지를 그려내기에 수궁가가 제격이라 판단했다”면서 “수궁가는 동화로 많이 소비됐지만 인간사에 대한 풍자를 담은 깊이 있는 작품이다. 이날치 열풍을 통해 수궁가가 재평가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